항목 ID | GC04208447 |
---|---|
한자 | 朴谷- |
영어의미역 | Bakgok Village |
이칭/별칭 | 박실(朴室)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 박곡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공태도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박곡(朴谷) 마을은 박씨(朴氏)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실(朴室)이라고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박곡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부산~울산 간 고속 도로 공사 중에 고려·조선 시대 기와 가마터와 고분군, 돌방무덤 등이 발굴되어 오랜 역사를 지닌 거주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박곡 마을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421년(세종 3) 9월 16일조에 “경상도 관찰사로부터 기장현(機張縣) 성내에는 우물물이 없어서, 현아(懸衙)를 박곡리(朴谷里)로 옮기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어 그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박곡 마을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 청사 대접, 부가 구연목 항아리, 청자 대접 등의 토기류가 많아 예부터 박곡 마을에 도공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도공들이 살고 있던 박곡 마을 전 주민을 일본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박곡 마을에서 불과 3㎞ 지점에 있는 기장 두모포에 있던 왜성 앞 해안을 통해 일본으로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끌려간 박씨들 가운데 박평의(朴平意)[일본에서 세기적인 도공예의 창시자인 이삼평(李參平)과 함께 언급되는 도공]가 바로 기장의 박곡에서 강제 이주된 박씨 도공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곡 마을이 속한 지역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기장현 동면 고성리(古城里)로 기재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에는 기장군 동면 교동(校洞)이 되었으며, 1914년 동래군 기장면 교리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박곡 마을 터를 소류지로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굵은 향나무 재목 등이 발굴되어 옛날에 주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08년 교리 노인회 김세국(金世國)[당시 78세]이, “조선 시대 때 이곳 박실에서 많은 인물들이 나 이를 시기하는 세력들이 집을 뜯어 버리고 못을 팠다.”고 증언하였다.
[자연 환경]
일제 강점기 박곡 마을 집터를 뜯고 판 못을 박실못[박실제: 박곡을 박실로 불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불렀다. 또한 박실못 안쪽에 있는 들을 못안, 논을 박실논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위치는 현재의 교리 주공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로, 북서쪽에 셋드산이 있고, 남동쪽으로는 평지가 나타난다. 마을은 셋드산의 골짜기 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박곡 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못이 되었다가 다시 매립되어 주거지로 변하는 과정을 거치며 옛 흔적이 사라졌다. 현재는 교리 주공 아파트와 박실 빌라 등 주거지로 변화되고, 박실길이라는 이름만 남아 그 흔적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