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379 |
---|---|
한자 | 九七- |
영어의미역 | Guchil Village |
이칭/별칭 | 옻밭골[漆田谷]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구칠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
변천 시기/일시 | 1895년 - 기장군 남면 구칠동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구칠동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구칠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구칠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 |
자연 마을 | 구칠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원래 옻나무가 많아서 옻밭골[漆田谷]이라 하였다. 옻은 한자로 ‘옻 칠(漆)’ 자를 쓴다. 큰 옻나무 아홉 그루가 있어서 구칠(九漆)이라 하였다고 한다. 옻나무가 언덕 위에 자생하여서 구칠(邱漆)이라 하기도 하였다. 옻은 사람에게 옻독을 입히는 원수 같은 나무라 하여 ‘원수 구(仇)’ 저를 써서 구칠(仇漆)이라 하였는데, 후대에 쓰기 편하고 소리가 같은 구칠(九七)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한편, 구칠을 갈치재와 관련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갈치재는 기장군 철마면과 기장읍, 동래를 연결하는 큰 고개다. 갈치재는 거칠재의 방언이다. 거칠재가 가칠재, 구칠재, 귀칠재, 갈치재 등으로 변음되었다는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임진왜란 이후 동래 정씨(東萊鄭氏)가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차성가(車城歌)」에 “일장 호접(一場胡蝶) 깨닌(인) 잠니(이) 구칠(舊柒)이 한가하다.”라고 하여 구칠이란 지명이 나온다. 1904년(고종 41) 간행된『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에 의하면, 당시 기장군 남면 구칠동(九七洞)에는 34호가 살고 있었다. 집은 대개 초가 2~4칸이었다. 정씨(鄭氏)[25호]가 가장 많이 살고, 다음이 김씨(5호) 순이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상서면 구칠동이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로 개편되었다.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성(朝鮮の姓)』에 의하면, 당시 동래군 철마면 구칠리는 동래 정씨 20가구가 사는 동성 마을이었다고 한다. 1973년 양산군에 편입되었고,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구칠 마을 남쪽으로 갈치재가 있고, 동쪽으로 일광산, 북쪽으로 아홉산이 있다. 이 산지 내 마을 앞으로 구칠천이 흐르고, 그 옆에 집앞들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구칠 마을은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279번지 일대 10통 지역 일대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마을 안에 경로당과 함께 사용하는 구칠 마을 회관이 있다. 그 옆에 동래 정씨 입향조를 기리는 칠원재(漆圓齋) 재실이 이 마을이 동래 정씨 집성촌임을 말해 준다. 마을의 주업은 벼농사이다. 옛날에는 잠업이 성하였으나 지금은 하지 않고, 누에고치 수매와 뽕나무 열매인 오디[桑實]가 큰 소득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