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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9149
한자 淸館-
영어의미역 Cheoggwan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청관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경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개설 시기/일시 1951년 - 부산시 중부출장소 영주동이 됨
변천 시기/일시 1957년 - 부산시 중부출장소 영주동에서 부산시 중구 영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부산시 중구 영주동에서 부산직할시 중구 영주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중구 영주동에서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청관 마을 -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청관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청관(淸館)이란 이름은 마을에 청국영사관과 청국 전관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붙여졌다.

[형성 및 변천]

1884년(고종 21) 청관 마을이 있던 지역에 청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청국영사관이 설치되고 청국 전관 조계지를 설치하였다. 청관이 들어선 이후 그 주위로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점포[상해로부터 가져온 각종 비단과 포목, 꽃신, 거울, 화장품 등을 판매]와 집이 늘어나게 되었다. 청일 전쟁[1894~1895]에서 청국이 패하자 영사관이 폐쇄되고 중국인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898년(고종 35) 영사관이 다시 개설되며 거류민이 늘어나게 되고, 1913년 일본과 청국 간에 체결된 ‘재한 청국 거류지 폐지 협정’으로 청국 조계는 폐지되었지만 소유권은 인정받아 청국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청국인 거류지를 일제 강점기에 ‘시나마찌[支那町]’로 불렀다.

1945년 11월 중국에서국공 내전이 시작되며 공산 정권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중국인들이 청관 마을에 정착하여 기존 정착자와 함께 화교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청관 마을은 1951년 부산시 중부출장소 영주동에 속하고, 1957년에는 중구 영주동 청관 마을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청관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청관 마을의 서쪽에는 구봉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평지가 나타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 동쪽 평지[현 부산역 앞]에 소나무가 우거진 모래사장이 있었고 고분(古墳)이 있었던 곳이다, 그 동쪽으로 바다가 있었다. 현재는 해안이 매립되어 평지이다. 청관 마을은 바닷가 고분을 철거한 자리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현황]

청관 마을은 영주 1동과 동구 초량 1동에 걸친 마을로, 마을 내에 부산화교협회와 부산화교소학교, 부산화교중고등학교가 있으며, 화교가 경영하는 중국요릿집과 중국요리 재료상 등이 있다. 최근에는 국내로 유입된 중국·동남아시아·남부아시아의 이주 결혼 여성이나 이주 노동자가 늘어나며 다양한 국가의 식재료와 생활 용품 등을 판매하는 상점이 늘어나고 있다. 상점이 밀집한 구역은 상해 거리, 러시아 거리, 텍사스 거리 등으로 불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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