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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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島里- |
영어의미역 | Yudori Village |
이칭/별칭 | 유두리(柳頭里) 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유도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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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10년 -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에서 경상남도 부산부 좌이면 유두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부산부 좌이면 유두리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유두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유두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삼락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삼락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삼락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삼락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삼락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삼락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으로 개편 |
자연 마을 | 유도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유도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유도(柳島)라는 이름은 예전 섬 주위에 많이 심어져 있던 왕버드나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두리(柳頭里)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도리(柳島里)는 소요리(所要里)와 함께 조선 시대 양산군 좌이면에 속하였을 때의 공식 지명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낙동강 하구 지역의 하중도(河中島)인 소요저도와 유도, 국매섬은 구포의 행정권에 속하여 양산군에 속하였다. 유도리 마을은 조선 시대 중엽인 1600년대 초 김녕 김씨(金寧金氏) 문중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인 유헌(柳軒) 김영필(金永弼) 집안이 섬을 개간하고 정착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김영필의 손자인 김준옥(金峻玉)이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양산군지(梁山郡誌)』와 「김준옥 묘명(金峻玉墓銘)」에 기록되어 있다.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1786]에는 유도의 공식 지명으로 양산군 좌이전면(左耳田面) 유도리가 보인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좌면(左面) 유도리, 『양산읍지(梁山邑誌)』[1831]에는 좌이전방(左耳田坊) 유도리로 되어 있다. 1910년에 양산군 좌이면에서 부산부로 편입되고, 1914년 동래군 사상면 유도리가 되었다. 이때 유두리의 일부가 감전동에 편입되었다. 1917년 일제가 편찬한 『신구 대조 조선 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에 좌이면 유도동 일부가 유두동(柳斗洞)이 되었으며, 감전동 쪽에도 유도동 일부가 편입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유도가 유두리로 편입된 것을 알 수 있다.
유도에서 출발한 지명이 유두(柳頭), 유두(柳斗)로 변천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두(柳頭)란 지명은 1906년에 제작된 지도의 섬 이름에도 나와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낙동강 양안의 제방이 축조되며 섬은 육지와 연결되고, 샛강은 낙동강변을 따라 흐르는 삼락천[삼락동에서 발원하여 남류하다 감전동 일대에서 낙동강에 유입]이 되었다. 이 시기에 유두리는 섬 자체가 강둑에 잘리어 3분의 2 이상이 강 쪽으로 편입되고, 강 안쪽에 남은 땅은 삼락리로 통합되며 유두리란 지명도 사라지게 된다.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삼락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구 삼락동이 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유도리 마을이 되었다.
유도리 마을의 위치는 다양한 문헌에 나타난다. 1767년(영조 43)에 제작한 『조선 팔도 지도』 「경상도편」에 유포도(杻浦島)가 나오고, 『해동 지도』의 경상도 「양산군편」에 “유도(柳島) 거관(距官) 46리(里)”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872년(고종 9)에 제작한 『지방도』의 「양산군편」에도 유포도가 나온다. 1878년(고종 15) 편찬한 『양산군읍지』에 나오는 하구 지역의 「도서편」에 유포도(杻浦島)와 소요도(所要島)가 강 동쪽 섬으로 나타난다.
1870년대 초의 『경상도 지도』, 『각 읍 지도』, 『영남 지도』, 『해동 지도』의 ‘양산군편’을 보면, 동시대의 지도이면서도 한 개의 섬으로 표시하거나 그 명칭만 유도 또는 소요도로 서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는데, 이런 점으로 보아 유도와 소요도는 하나의 섬으로 고착되었으나 명칭은 두 개로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산군읍지』 산천조에 보면, “유도[소요저도]는 대저도 동쪽에 있으며, 전답이 수백 경이 되고 토질이 극히 비옥하나 홍수나 해일이 일면 물에 잠기는 곳이다. 섬 가운데 나무가 심어져 있으니 활인수(活人樹)라고 한다. 김준옥이라는 사람이 심은 것으로, 해수가 넘쳐 들어오면 사람이 모두 이 나무에 의지해 생명을 구하는 고로 그리 이름 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상구 모라동의 서당골 골짜기 산언덕에 있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김준옥의 공적을 후대의 양산 군수 유인목(柳寅睦)이 찬양한 묘명에 보면, “김준옥은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물 피해를 막아 삼차수(三叉水) 양양(洋洋)한 곳에 한 섬을 편안케[一島晏] 한 공이 있다.”고 새겨져 있다.
김씨 문중에서는 이 섬에 정착하여 살면서 제일 위쪽인 새각단 지역에서부터 제방을 쌓고 중심부에는 제방을 고리처럼 둥글게 쌓았다. 그리고 동쪽에 산처럼 땅을 돋우어 포구나무 3그루를 심었는데, 이 산을 동산(東山)이라 하였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를 뒷날 홍수나 해일 때 사람들이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하여 활인수 또는 활인정(活人亭)이라 한 것이다.
유도에 쌓았던 물막이 큰 제방을 대언(大堰), 중간 제방은 중정언(中楨堰), 뒤에 새로 쌓았던 제방은 신언(新堰)이라 하였다. 동산 쪽에 있었던 들판은 동산평(東山坪), 유도의 서쪽 들판은 가야평(佳也坪)·관방평(寬坊坪), 새들판은 신방평(新坊坪)이라 하였다. 1904년(고종 41) 낙동강 하구 지역 지도에는 유두(柳頭)로 표기된 큰 섬이 나온다. 이때의 유도는 위쪽의 소요도와 아래쪽 국매섬[오복섬]까지 이어진 큰 섬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유도리는 위쪽 소요도와 아래쪽 국매섬의 중심이 되는 섬마을로 중섬이라 불렀다.
[자연 환경]
유도리 마을은 동쪽을 제외하고 사방이 낙동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 맥도로 가는 나루가 있었고, 강 건너 서남쪽에 맥도가 있다.
[현황]
유도리 마을은 삼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1930년대 일제의 낙동강 제방 공사로 섬의 3분의 2가 제방과 강 쪽으로 편입되어 유도리 마을은 현재 삼락 강변 체육공원과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김해로 이어지는 경전철과 낙동강 대교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