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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857
한자 掛乃里-
영어의미역 Gainaeri Village
이칭/별칭 과내 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괘내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괘법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괘법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괘법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괘법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괘법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괘법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괘내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괘내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괘내리(掛乃里) 마을은 원래 마을 앞 나루터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냇물이 괴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괸내’라 부르던 것이 괘내가 되었다고 한다. 혹은 일찍이 사상 일대의 중심 구실을 하여 깃대를 걸던 냇가 동네라고 하여 ‘걸 괘(掛)’ 자에 내(乃) 자를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마을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서낙동강 지류였는데, 이를 개[海]라고 하여, 괘내의 ‘괘’는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과내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형성 및 변천]

괘내리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분들을 위한 연구 제단(戀舊祭檀)이 설치되어 있어 마을의 형성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사천면 상단괘내리가 나타나며,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1832]에는 사상면(沙上面) 괘내리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사상면 관내에 괘내동이 있었다. 당시 괘내동의 호수는 9호였고, 그 가운데 김씨(金氏) 2호, 정씨(丁氏) 2호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괘내리창법리를 합쳐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괘법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괘법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부출장소가 북구로 승격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괘내리 마을이 되었다. 괘법동 지역은 일찍이 사상의 중심지 기능을 하여 조선 시대에는 사상면사무소가 소재하였고, 이후 사상출장소와 북부출장소도 있었다. 1995년 사상구 설치 당시 사상구청이 있었으나 2002년 감전동의 현 청사로 이전하였다.

[자연 환경]

괘내리 마을 동쪽으로 백양산이 있고,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백양산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다. 예전에는 백양산에서 마을 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괘내 고개라고 하였고, 여기서 다시 마을 앞으로 뻗은 산을 회산이라고 하였다. 이 회산에 팔경대가 있었다. 팔경대는 사상 팔경의 하나이다. 팔경대에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다. 하늘의 여덟 선녀가 이곳 대(臺)에 내려와 동쪽에 있는 천지(天池)에서 목욕하고 이곳에서 춤을 추고 놀다가 상천하였다고 하여 팔선대(八仙臺)라 했다는 설화도 전한다. 『동래부지』 고적조에 보면 “팔경대는 동래부의 서쪽으로 30리 되는 사천촌 낙동강변에 있는데, 경색이 중국의 소상 팔경과 같으므로 이렇게 이름 하여 부른다[在府西沙川村洛江邊景色瀟湘同故以比云].”라고 하였다.

[현황]

괘내리 마을은 현재의 사상역 북쪽으로 사상 지역의 중심이었던 자연 마을이다. 괘내리 마을 동쪽을 동괘 마을, 서쪽을 서괘 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현재 백양산 기슭으로 신라대학교, 신라중학교 등이 들어서 있다. 또 이곳에는 사상 9인 의사 연구 제단(沙上九人義士戀舊祭壇)이 있다. 이 제단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 마을의 일부 생존자들인 9명이 함께 전쟁에 참여하고 전사한 사람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계를 조직하고 제단을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본래 이 제단은 벼락산에 있었으나 1970년대 사상 지역 개발 사업으로 벼락산이 없어지자 마사산으로 옮겨 오늘날까지 제향하고 있다. 1988년 사상구인의사연구제단보존회에서 새로 비석을 세우고 주변 일대를 정화하였다.

괘법동에 있는 괘법 할배·할매 당산은 백양로 위쪽 백양산 절개지 위에 있다. 옛날에는 사상역 회산 위에 있었으나 사상 공업 단지를 조성할 때 산이 착평되면서 1972년에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새로 건립하였다. 제당은 둘로 왼쪽은 산신 할배당, 오른쪽은 산신 할매당이다. 두 제당 모두 기와 팔작지붕이다. 제의는 1년에 한 번, 음력 정월 12월 2일 밤 자정에 올린다. 괘법의 지명이 창포→ 창진→창법→ 창날→ 동괘→ 괘법으로 변했지만 지금도 일부 마을 사람들은 ‘창날 당산’이라고 부른다. 요사이는 산신 할배당과 산신 할매당의 제사를 분리하여 행하는데, 제물이나 의식 등은 모두 같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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