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8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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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栗里-金谷洞- |
영어의미역 | Yuli Village[Geumgok-dong]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율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표용수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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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831년 -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율리 |
변천 시기/일시 | 190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율리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좌이면 율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좌이면 율리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율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43년 -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율리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읍 율리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읍 율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 금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구포출장소 금곡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금곡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금곡동에서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으로 개편 |
자연 마을 | 율리 마을 -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율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이 지역은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이라고 하였는데, 밤나무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자로 ‘밤나무 율(栗)’ 자를 표기하여 율리(栗里) 마을[금곡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율리 마을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인근에서 신석기 유적지인 율리 패총에서 빗살무늬 토기 등과 청동기 시대로 이어지는 유적이 확인되어 지금의 마을 당산나무에서 알터 바위까지를 중심으로 마을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1906년 양산군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개편되었다가 1910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구포면 금곡리가 되었다. 1943년 구포면이 구포읍으로 승격하였다. 1963년 1월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 구포출장소 금곡동이 되었다 1978년 2월 구포출장소가 북구로 승격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율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율리 마을은 금정산[802m] 봉우리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 기슭에 있다. 마을 동쪽에는 서당골[고개를 넘어 대천리 양달 마을 서당을 다녔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율리 패총이 있는 골짜기이다.]이 있다. 남쪽에는 금정산에서 흘러내린 대천천이 서쪽으로 흐르고, 서쪽은 낙동강과 낙동강 연안의 평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의 식수는 고당봉 아래 명근쟁이골[옛날 망건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에서 물을 끌어 와 사용하였으며, 서쪽 낙동강 사이의 저습지를 농경지로 이용하였다.
[현황]
율리 마을과 낙동강 사이 저습지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화명 뜨란채 아파트와 주공 5·6단지]가 조성되었으며, 동쪽 금정산 쪽으로도 시가지가 조성되어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마을의 서쪽, 들판이 있던 지역에는 한국산업인력공단 부산지역본부, 금명초등학교, 금명중학교, 금곡고등학교 등이 입지해 있고, 마을 서쪽 평지에 금곡로(金谷路), 도시 철도 2호선, 경부선 철로가 관통하고 율리역이 있다. 마을 입구에 있던 천승호·경주 이씨 정려비가 도로 공사로 금곡 청소년 수련원으로 옮겨져 있다. 마을 접경에 화명 신시가지가 건설되면서 빠르게 외부인이 유입되어 자연 마을로서의 율리 마을은 사라져 가고 있으나 율리역, 율리 바위 그늘 유적 등의 이름 속에 흔적이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