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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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里-金城洞- |
영어의미역 | Jungri Village[Geumseong-dong] |
이칭/별칭 | 중리동,산성 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중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진모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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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수 | 186가구 |
인구(남, 여) | 460명[남 211명|여 249명] |
변천 시기/일시 | 1740년 - 동래부 북면 산성리 |
변천 시기/일시 | 1910년 - 북면 금성동 |
변천 시기/일시 | 1917년 - 부산부 좌이면 금성동 |
변천 시기/일시 | 1918년 - 동래군 구포면 금성동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에 편입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동래구로 편입 |
변천 시기/일시 | 1988년 - 금정구로 분구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금정구 금성동 중리 마을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중리 마을로 개편 |
자연 마을 | 중리 마을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북문로 14[금성동 2통] 중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금성동의 중간에, 그리고 금정산성의 중성문(中城門)에 위치하여 중리(中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형성 및 변천]
중리 마을[금성동]은 통일 신라 때 창건한 미륵암·국청사·해월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부터 거주지로 이용되었으리라 추정되지만, 마을이 형성된 것은 금정산성의 축조[1703]와 함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동래부 북면 산성리(山城里)가 나타나는데 산성리는 공해·죽전·중리 마을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으로 1910년에 금성동으로 바뀌기 전에는 줄곧 산성리(山城里)라 하였다.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는 동래군 북면 산성리에 정씨(鄭氏) 2호, 오씨(吳氏) 7호, 이씨(李氏) 10호, 김씨(金氏) 14호, 추씨(秋氏) 2호, 지씨(池氏) 1호, 최씨(崔氏) 1호, 홍씨(洪氏) 3호, 양씨(梁氏) 1호, 장씨(張氏) 2호, 변씨(邊氏) 1호, 윤씨(尹氏) 2호, 국씨(鞠氏) 1호, 성씨(成氏) 2호, 박씨(朴氏) 1호, 도씨(都氏) 2호의 총 52호가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중 이씨는 1800년 경 중리 마을의 입향조로 알려져 있다.
1910년에 북면 금성동, 1917년 부산부 좌이면 금성동, 1918년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되었다가, 1963년 1월1일부로 부산시가 직할시로 승격될 때 부산진구 관할에 편입되었고, 1978년 2월 15일부로 동래구에 소속되었다가, 1988년 1월 1일 금정구 금성동에 편입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중리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중리 마을은 금정산 고지대 분지[400m]에 위치한 마을이다. 금정산[801.5m]과 고당봉(姑堂峰)이 북쪽에 위치하고 마을의 남쪽으로 안산(案山)과 파리봉(玻璃峰), 상계봉[640m]이 우뚝 솟아 있다. 동문골, 가장골의 계곡수는 곤실내[대천천 상류]로 흘러든다.
[현황]
2012년 4월 현재 인구는 186가구에 총 460명으로 남자가 211명, 여자가 149명이다. 금정산성 내에 위치한 마을로 현재도 자연 마을의 형태가 거의 유지되고 있다. 마을 주변에 금성동주민센터, 금성동새마을금고, 금성초등학교가 있으며, 산성 막걸리 제조장[대한민국 민속주 제1호] 등이 있다. 주민은 대부분 금정산성을 찾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