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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리 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872
한자 所要里-
영어의미역 Soyori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소요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10년 - 경상남도 양산군 좌이면 소요리에서 경상남도 부산부 좌이면 소요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부산부 좌이면 소요리에서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삼락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삼락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삼락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삼락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삼락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삼락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소요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소요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소요리(所要里)라는 이름은 소요저도(所要渚道)에서 비롯되었다. 소요저도는 조선 시대 낙동강 삼차수(三叉水)의 한 줄기인 유두강이 구포 쪽에서 소요저도의 동쪽, 즉 사상 쪽으로 흘렀다는 기록에서 물길이 갈라지는 중요한 요지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형성 및 변천]

소요리 마을은 하중도(河中島)인 소요저도에 있던 섬마을이었다. 소요저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산군편에 “소요저도는 대저도(大渚島)의 동쪽에 있으며, 밭 수백여 두락(斗落)이 있는데 땅이 몹시 기름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마을로 본다. 소요저도의 바로 아래쪽에는 유도·국매섬이 있었는데, 뒤에 토사가 퇴적하며 한 개 섬으로 바뀌게 된다. 『양산군읍지(梁山郡邑誌)』[1786]에는 양산군 좌이전면(左耳田面) 소요리(所要里)로,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는 좌면(左面) 소요리로, 『양산읍지(梁山邑誌)』[1831]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에는 좌이전방(左耳田坊) 소요리로 나타난다. 옛 동래 지역의 「고지도(古地圖)」에도 유포리와 함께 소요리가 나타난다.

1910년 양산군 좌이면에서 부산부로 편입되며 소요리를 삼락리로 개칭했는데, 이에 대해 소요리는 일제가 마을 이름을 소요(騷擾)로 오인할 것을 우려해 지명을 변경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 사상면 삼락리가 되었다.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으면서 소요리 마을이 속한 섬의 2/3 이상이 강 쪽으로 유입되어 둔치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삼락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어 그 관할이 되었다가 1978년 북구 삼락동이 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고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소요리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소요리 마을 동쪽으로는 삼락천이, 서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현황]

소요리 마을은 현 낙동강 둔치 지역으로, 낙동 대로가 남북으로 가로 지른다. 그 주변에 아파트와 주택지, 공업 단지 등이 들어서 있다. 소요리 마을이 있던 소요저도는 소요도, 또는 솔섬, 소래섬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소요저도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삼차수 물길을 사이에 두고 사상의 덕포리 주민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농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덕포리 진선계(津船契)에 전해 오는 고문서 중에 동래 부사에게 올린 『사상면 덕포리 거민등장(沙上面德浦里居民等狀)』에 소요저도에 농사를 지으러 가면서 타고 다니던 배를 수리하기 위한 어려움을 호소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삼차수 물길이 갈라지는 곳에 있던 기름진 땅을 보유한 중요한 섬이었음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1910년경 일제가 조사한 『조선 지지 자료(朝鮮地誌資料)』에 소요리에 있던 옛 지명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곳에 있던 나루터는 소요진(所要津), 강변에 주민들이 쌓았던 제방은 소요제(所要提), 제일 큰 들판은 대평(大坪), 작은 들판은 소평(小坪), 절골 운수천 쪽과 마주 보는 곳은 사곡평(寺谷坪), 모라리에 있던 사천원(沙川院), 역원의 둔전답은 사천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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