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8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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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Popuramach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포푸라마치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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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감전동 |
변천 시기/일시 |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감전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감전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감전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2008년 - 행정동인 감전 1동과 감전 2동이 감전동으로 통합 |
자연 마을 | 포푸라마치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포푸라마치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포푸라마치 마을은 포플러[미루나무]가 많은 곳이라고 해서 생겨난 지명이다. 일제 강점기 주막거리를 형성한 이곳을 찾아온 일본 사람들이 서천둑[西提堰]에 포플러가 많은 것을 보고 포푸라마치[町], 뽀뿌라미찌, 포푸라[포프라], 포플러마치[마찌]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 현 사상구 감전동의 감동 마을과 서전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둑을 쌓을 때 둑 가운데 수문(水門)을 설치하였고,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강둑에 포플러 수백 그루를 심어 기다란 숲을 이루었다. 감동 마을에서 서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서천(西川) 북서쪽 둑 위에 1902년(고종 39) 초량에서 구포까지 경부선 철로 1차 공사가 시작될 때 공사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상대로 주막(酒幕)이 생겨났다. 그 뒤 사상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주막 옆에 콘크리트 다리가 서전 마을 쪽으로 흐르는 서천 위에 설치되었고, 1921년 11월에는 경부선 사상역(沙上驛)이 생기면서 역 앞까지 도로가 개설되며 주막 앞을 내왕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괘법동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경사가 심해서 고갯길을 넘어오는 자전거, 우마차 등이 주막에서 쉬어 가면서 장사가 잘 되었다.
그 후 주막거리가 성업을 이루어 8·15 광복 후에는 5~6개소의 주점이 영업을 하였다. 6·25 전쟁 때는 미군 고사포 부대가 팔경대 회산 부근에 주둔하게 되면서 포푸라마치 주점 주위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술집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여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환락가로 변하였다. 1968년 부산직할시에서 사상 지역 저습 지대를 매립하여 사상 공업 단지를 조성하면서 공장 종업원들을 상대로 주점거리로 술집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유흥가로 변모하였다. 이후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나 유흥가를 중심으로 불법 성매매를 하는 등 사창가로 변질되어 가면서 포푸라마치라는 사창가 거리로 알려지게 되었을 정도였는데 당국의 방침으로 없어졌다.
행정적으로는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 사상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8년 북구 감전동이 되었다. 1979년 감전동이 행정동인 감전 2동이 되었으며,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북구에서 사상구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포푸라마치 마을이 되었다. 2008년 행정동인 감전 1동과 감전 2동이 감전동으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포푸라마치 마을은 북쪽으로 사상구 괘법동과 인접한다. 동쪽에 백양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현황]
포푸라마치 마을은 윤락가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현재 감전 2주택 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새로운 주거 단지로 탈바꿈하였다. 농협 감전동지점 등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