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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1078
한자 九德里-
영어의미역 Gudeokri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 구덕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학장리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학장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학장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학장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학장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학장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학장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학장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구덕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 구덕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옛날 이곳에 아홉 집이 살았다고 해서 구덕리(九德里)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구덕산에 명당(明堂) 자리가 아홉 곳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집안이 크게 번성한다고 하여 구덕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구덕은 전해 내려오는 ‘구덩[굴]’, ‘구덩이[坑]’, ‘구지기(久至岐)’, ‘구덕기(九德岐)’에서 ‘구덩이 골짝’→‘구덕이 골짝’에서 음이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구덕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덕 고갯길 입구를 개발할 때 조개더미[패총]가 소규모로 발견되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구덕골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구덕천(九德川) 수량이 풍부하여 이곳에 계단식 논이 일찍부터 형성되어 작은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상 지역 고문서인 「사천면 구동계 좌목(沙川面舊洞契座目)」[1629]에 구덕 마을 강억산(姜億山)이 동계(洞契)에 차일(遮日)용 베 반 필을 기증하고, 향사회(鄕射會)에도 후포(帿布) 반 필을 기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구덕리의 지명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888년 사상면의 『사상면 호적중초(沙上面戶籍中草)』에 구덕리(九德里)가 독립된 마을로, 호구 수(戶口數)는 3호(戶)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학성리, 장문리, 구덕리를 합쳐 동래군 사상면 학장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학장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구 학장동이 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 구덕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구덕리 마을 동쪽으로 엄광산, 남쪽으로 승학산구덕산이 있다. 구덕산승학산이 만나는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황]

구덕리 마을은 지금의 사상구 학장동서구 서대신동 경계를 이루는 구덕산(九德山)[562m)의 산록인 구덕 고개로 오르는 산길 왼쪽 산비탈에 있었다. 현재 대남병원, 부산광역시립정신병원, 구덕민속촌 등이 들어서 있다. 구덕 터널을 통과하면 대신동으로 이어진다. 구덕 고개는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어 가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이 고갯마루가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숲을 벌채하여 공동묘지를 조성하면서 사라졌다. 고갯마루에는 주막집이 있었고 그 옆에 부산부동래군의 경계 표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길이 없다.

구덕산 구덕령에는 많은 속설과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주례에 있던 변장사(邊壯士) 넋이 아홉 마리 비둘기[鳩]가 되어 이 산에 앉았다 하여 구덕산(鳩德山)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옛날부터 사상 사람들은 이곳 구덕 고개를 넘어 부산포에 가는 것을 “관(館)에 간다.”고 하였다. 여기서 ‘관’이란 초량에 있던 ‘초량 왜관(草粱倭館)’[지금의 용두산 공원복병산 일대]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부산이 포구 이름보다 왜관이란 말로 더 알려져 있었다. 왜관 근처에 가면 진귀한 물품도 살 수 있고 우리 물품도 비싸게 팔 수 있었으며, 기모노 입은 일본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어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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