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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대 마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1106
영어의미역 Dambaetdae Village
이칭/별칭 연관(煙管) 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 담뱃대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
변천 시기/일시 1942년 -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에서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복정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9년 -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복정에서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출장소 복천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57년 -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출장소 복천동에서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부산직할시 동래구 복천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동래구 복산동에서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담뱃대 마을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담뱃대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담뱃대 마을은 담뱃대 생산으로 유명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뱃대는 유기(鍮器)와 함께 조선 후기부터 동래의 명산물이었다. 담뱃대는 동래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모양·색깔·무늬 등에서 품질이 좋아 서울 양반들의 수요는 물론 진상 물품이 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동래 담뱃대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담배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당시 동래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고,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각색 장인조(各色匠人條)에 유기장 5명과 유장(鍮匠) 2명이 있으며,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9세기 초]의 ‘예규지(倪圭志)’ 팔역 장시(八域場市)에도 동래장에 유기가 판매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전부터 동래 담뱃대가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때부터 담뱃대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담뱃대 마을은 1914년 3월 행정 구역 개편 때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복천동에 속하였다. 1942년 10월 경상남도 부산부 동래출장소 복정(福町), 1949년 8월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출장소 복산동에 속하였으며, 1957년 1월 경상남도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 속하였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하였고, 복천동·칠산동을 합쳐 행정동인 복산동이 만들어졌다. 1995년 1월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면서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담뱃대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1922년 3월 15일 『동아 일보』 기사에 “동래는 예로부터 담뱃대로서 유일무이한 생도(生道)를 삼아 옴으로 인하여 수백 년 전부터 수공업이 매우 발달되어 수천 명의 직공이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래 담뱃대는 1900년대 초부터 일제 궐련이 담배 시장을 잠식하고, 1930년경부터 일본에서 기계적인 대량 생산과 담뱃대 흡연자의 급격한 감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담뱃대의 주요 재료 중 하나인 니켈의 수입 금지로 쇠퇴하였다. 1960년대 담뱃대 생산이 중단되면서 담뱃대 마을에도 변화가 일어나 공장은 주택지로 바뀌었고, 도로 변에 상점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렀다.

[자연 환경]

담뱃대 마을 동남쪽으로 마안산에 뻗어 내린 복천동 고분군 능선이 있고, 북쪽으로도 산이 있으며, 서남쪽은 비교적 평지로 이곳에 주택·상가 등이 자리 잡아 공기는 좋은 편이다.

[현황]

담뱃대 마을복천동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 남쪽 도로 아래쪽 일원에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담뱃대 생산의 중단과 함께 주택지로 바뀌어 현재는 복산 1구역 주택 재개발 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나 사업 시행이 불투명하다. 서남쪽에 동래 시장수안 인정 시장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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