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1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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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浦下里- |
영어의미역 | Deokpo-Har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덕포하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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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740년 - 동래부 사천면 상단덕포리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덕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덕포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덕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덕포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덕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덕포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으로 개편 |
자연 마을 | 덕포하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덕포하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덕포하리(德浦下里) 마을은 덕포동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아랫덕포 마을, 아랫각단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덕포하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이 자리한 지역이 사람이 거주하기 좋은 위치여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인근의 덕천동에서 발견된 고분군의 조성 시기가 삼국 시대부터였다는 것에서도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 지명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사천면 상단 덕포리 거관문 34리(沙川面上端德浦里距官門三十四里)”로 처음 확인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에 편입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덕포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구 덕포동이 되었다. 1982년 덕포동이 행정적으로 덕포 1동·덕포 2동으로 분동하였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덕포하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덕포하리 마을은 동쪽 백양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서쪽으로 삼락천이 흐른다. 남쪽으로 엄광산과 승학산이 보인다. 덕포하리 마을과 덕포상리 마을 사이에 있는 전답 남쪽으로 도랑이 있고, 그 물이 하강선대 옆으로 흘렀다. 이 도랑에 둑이 있었는데, 이를 ‘구분디’라고 하였다. 구분디 아래 저습지에서 미나리를 재배하였다. 또 사상구 덕포동과 괘법동의 경계를 이루는 덕개천이 흘렀는데, 덕개천은 괘내골에서 발원하여 지금의 사상초등학교 하강선대 남쪽, 괘법동의 강변 동원 아파트 쪽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덕개천은 한내천이라고도 하였다.
[현황]
덕포하리 마을은 사상구 덕포 1동에 있던 자연 마을이다. 현재는 덕포 1동 주민자치센터, 사상초등학교, 사상고등학교를 비롯한 아파트와 주택지로 변모하였다. 덕포동에는 강선대가 두 곳 있다. 덕포상리 마을에 있는 것을 상강선대, 이곳 덕포하리 마을에 있는 것을 하강선대라고 한다. 강선대가 위치한 곳은 조선 시대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으며, 강선대 주변에는 촌락이 있었고,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마을 앞 강 이름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불렀다.
하강선대에 있는 당산은 할매 당산이다. 사상구 덕포 1동 721-1번지에 있는 할매 당산의 설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제당은 1947년 신축하였고, 1991년 개축하였다. 제당은 기와 우진각 지붕에 적갈색 벽돌로 되어 있다. 당산목인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여 년 넘었으며 제당 주위에는 세죽과 느티나무, 팽나무 10여 그루가 있다. 제의 날짜는 상강선대와 함께 음력 12월 1일 밤 자정이며, 1년에 한 번 제를 올린다.
하강선대와 인접하여 사상초등학교가 있는데, 1909년 괘내리에서 설립된 사립명진학교의 후신으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학교 정원에는 100여 년 전 학교 정문에 세웠던 ‘사립명진학교(私立明進學校)’ 돌기둥[石柱]을 복원해 놓았다. 원래 돌기둥은 2개가 있었지만 잃어버렸다가, 그중 학교명이 새겨진 돌기둥은 개울의 돌다리로 사용되던 것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당시의 학교 건물은 기와지붕의 구식 목조 건물이었다. 초대 교장은 사상 면장을 역임한 지양식(池陽植), 2대 교장은 모라 출신 학자인 강대성(姜大成)이었다. 학교 건물은 6·25 전쟁 당시 미군 부대가 주둔했을 때 실화(失火)로 전체가 불에 탔다가 1953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