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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555
한자 林基-
영어의미역 Yimgi Village
이칭/별칭 숲터 마을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임기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895년 - 기장군 하서면 임기동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임기리
변천 시기/일시 1973년 7월 1일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임기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임기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임기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임기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3월 1일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임기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로 개편
자연 마을 임기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임기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옛 이름은 숲터라고 하였다. 임기천 협곡이 이곳에 이르러 넓은 평지를 이루면서 숲이 우거진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입석 마을송정 마을이 번창하면서 이 숲을 농경지로 개간하였다고 전한다. 개간한 농경지를 숲터라고 불렀는데, 한자로 ‘수풀 임(林)’, ‘터 기(基)’ 자를 써서 임기(林基)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임진왜란 후에 김해 김씨(金海金氏) 형제가 이곳 숲터의 농경지를 경작하며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차성가(車城歌)」에 “임기촌(林基村)에 꽃푸엿고[피었고] 백운산(白雲山)에 달 떠 온다.”라고 하여 임기촌이란 지명이 나온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는 하서면에 마을 이름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19세기 이전은 하나의 동(洞)을 이룰 만큼 많은 주민이 거주하지 않아서 인근의 하서면(下西面) 입석방(立石坊)의 영역으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1904]에 의하면, 당시 기장군 하서면 임기리에는 49호가 살고 있었다. 집은 대개 초가 2~4칸이다. 강영홍(姜永洪) 등 초가 4칸 집이 12호이다. 김씨[26호]가 가장 많이 살고, 다음이 오씨[4호], 정씨[鄭氏, 4호] 순이다. 1914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기장군 하서면 임기동동래군 철마면 임기리로 개편되었다. 1973년 7월 1일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임기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임기 마을은 동북쪽으로 백운산(白雲山)[520.2m]을 두고 그 산줄기에 소학대(巢鶴臺)와 망일암(望日庵)이 있다. 망일암은 소학대[매 바위] 중간 동편 산등성이에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 동쪽으로 철마산이 있고, 서쪽으로 수영강이 있으며, 남쪽으로 임기천이 흐른다.

[현황]

임기 마을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772번지 일대 20통 지역에 있는 자연 마을이다. 입구에는 2002년 7월 12일 세운 임기 마을 표지석이 서 있다. 마을 놀이터 옆에는 ‘정석재 공덕비’가, 버스 정류소 옆에는 2000년 11월 25일 건립한 ‘6·25 참전 용사 기념비’가 서 있다. 마을 안에는 임기 새마을 회관이 있는데, 임기 노인정과 임기 부녀 노인정으로 함께 사용한다.

임기 마을은 주변이 강으로 둘러싸여 태풍 피해를 많이 본다. 특히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호 때 피해가 극심하였다. 최근 지표 조사로 선여사 터[船餘寺址]임기 마을 북쪽에 위치하였음을 알게 하는 사찰 터 유물과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임기천 주변 도로에 방치되어 있다가 임시로 지장암에서 보관하여 온 선여사 부도는 임기 마을 입구 소공원으로 옮겼다. 이 부도의 탑신 형태는 위만 둥글고 아래는 직선적인 종형이며, 탑신 위에는 삼륜을 모각하여 상륜부의 형태를 표현하였다. 기단부는 원형에 여러 겹의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기고에 비해서 탑신의 지름이 작아 다른 부도에 비해서 날씬하게 만들어져 있다.

임기리 유적은 임기 마을 동남쪽 낮은 구릉에 있는 분묘 유적과 북쪽 구릉의 토기 산포지 그리고 마을 앞자락의 토기 산포지 등 세 곳이다. 마을 앞에서 입석리에 이르는 넓은 부채골 대지에 위치한 토기 산포지는 현재 논과 밭으로 경작된다. 채집 토기는 통일 신라 시대 인화문 토기를 비롯하여 고배(高杯), 기탕 토기편이 채집되었다. 임기리 유적은 6~7세기에 이르는 복합 유적으로 추정된다.

임기리에 있는 선정비는 원래 ‘강유후 청덕선정 만고불망비(姜裕後淸德善政萬古不忘碑)’와 ‘김성뢰 청정휼민비(金聖賚淸政恤民碑)’ 2기가 있었는데, 김성뢰 청정휼민비는 분실되어 찾을 길이 없다. 지금은 임기리~송정리 간 도로 개설 공사로 마을 입구에 강유후 청덕선정 만고불망비 1기만 세워져 있다. 이 외에도 마을에는 3대 효자와 4효 묘가 있다. 한 가문에서 삼대로 이어지며 어버이를 극진히 섬긴 효자 김연(金鍊)·김봉의(金鳳儀)·김상제(金商濟)와 효부인 강씨(姜氏)가 포함되어 있다. 김연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청유공파 입향조 참봉공 휘(諱) 김청유(金淸有)의 11세손이고, 김봉의는 12세손, 김상제는 13세손이다. 효부 강씨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김연의 부인이다.

임기 마을에 거주하는 김해 김씨 참봉공청류파(參奉公淸有派)는 약 400여 년 전 양산에 입향하였다. 김해 김씨 가문은 임기리에 가장 먼저 들어왔으며, 대를 이어 효자와 효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마을의 주업은 농업으로 논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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