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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855
한자 駕浦-
영어의미역 Gapo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가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963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삼락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삼락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삼락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삼락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삼락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삼락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으로 개편
자연 마을 가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가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하중도로서 개[포(浦)의 뜻으로 ‘개’가 있는데, 이는 강이나 내해(內海)에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을 가리킨다]라는 의미이다. 갯가의 포구라 부른 것이 것이 가포라고 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邊]의 뜻에서 가포라 한 것을 한자로 가포(駕浦)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사육신의 후손이 역적의 멍에를 지고 들어온 곳이라 멍에개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가포로 표기하였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삼락동 지역은 본래 낙동강의 동쪽 샛강을 따라 길게 형성된 모래톱이었다. 조선 시대에 샛강 사이에 형성된 모래톱이 갈대밭으로 변하자, 그 갈대밭을 베어 내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샛강을 따라 제방을 쌓아 전답을 보호하며 섬으로 변모하였다. 삼락동을 구성한 섬은 소요저도(所要渚島)와 유도(柳島)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사상면에 편입되면서 유도는 유두리(柳斗里)로, 소요저도는 삼락리가 되었다. 1930년대 낙동강 제방을 쌓을 때 이들 섬의 3분의 2가 제방과 강 쪽으로 편입되면서 유두리란 지명도 사라지고 삼락리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삼차수의 한 줄기였던 유두강도 물목이 막혀 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삼락리란 지명으로 둔갑한 옛 섬마을은 낙동강 제방과 갇힌 물 따라 길고 좁은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옛날 유도에서 처음 생겨났던 가포도 배가 없는 나루터가 되면서 나루터 인근에 살던 20여 가구만 남아서 가포 마을을 형성하여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직할시가 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삼락동이 되었다.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부출장소가 승격하여 북구가 되었다.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였고,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가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가포 마을의 북쪽과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동쪽은 백양산이 둘러싸고 있다.

[현황]

가포 마을삼락동 간이 운동장 위쪽 낙동강변에 있던 자연 마을이었다. 삼락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현재는 삼락동 주민자치센터, 사상중앙병원, 삼락 생태 공원, 공업 단지 등이 들어서 있다. 예전에는 이 지역 일대가 강변이어서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가옥이 침수되기 일쑤여서 옛 유두강을 건너 모라 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라의 촌로(村老)들 사이에 전해 오는 농담 가운데 하나가, 평소에는 삼락동 지역 사람들이 모라 사람들을 보고 ‘모라 놈’이라 하다가 홍수가 지면 ‘모라 할배’라고 사정한다는 것이었다.

1968년 부산광역시에서 이 지대를 공업 단지로 조성하면서 삼락동의 동쪽 유두강을 매립하여 토지로 이용하고 그 대신 새로운 배수로를 인공으로 조성하여 감전 배수장까지 빠져나가게 하였다. 삼락동 가포 마을은 이 배수로인 삼락천을 경계로 모라동·덕포동과 접하고 남쪽으로 괘법동·감전동과 이어진다. 삼락동의 배수로 서쪽 지역은 낙동로를 사이에 두고 공장 지대가 되었다. 정부의 낙동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이곳 삼락천에서 감전 배수로를 거쳐 엄궁까지 강물을 유입하여 막힌 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삼락천에는 모라동덕포동을 건너는 다리가 많이 설치되어 차량이나 사람이 왕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1992년에 개축된 삼락동 송령당사상구 삼락동 396-10번지에 위치한다. 제당은 슬라브 지붕에 벽은 불록을 쌓아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제당 북쪽에는 수령 120여 년이 되는 소나무가 당산 나무로 남아 있다. 소나무 두 그루 중에서 고령인 이 나무는 비스듬히 누워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당산 나무에 시멘트 받침대를 설치하였다. 이곳 일대가 공장 지대로 바뀌면서 공장 안에 갇힌 당산 나무가 되었다. 그 외에 측벽나무 3그루가 북쪽 담장 가에 서 있다.

제의는 1년에 한 번 지내는데, 옛날에는 음력 정월 2일 자정경에 지냈으나 요사이는 음력 정월 10일 오시(午時)에 지낸다. 특이 사항으로 원래 이 제당의 이름은 가포 당산이었는데 1992년 제당을 새로 정비하면서 송령당(松靈堂)으로 개칭하였다. 이곳에서는 당산제만 지내며, 원래 당산 할배, 할매 두 분을 모셨으나 요사이는 없어진 앞마을 당산 신과 함께 세 분을 모시고 있다. 유도 쪽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포 마을은 공장 밀집 지대로 변하여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산 나무가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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