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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부산 지역의 역사. 조선이 건국되어 1397년(태조 6) 동래현(東萊縣)에 부산진(釜山鎭)이 설치되면서 동래 지역은 행정적인 면 뿐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위치도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부터 창궐하던 왜구가 동래현·동평현(東平縣)·기장현(機張縣) 등을 침범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처럼 군사적인 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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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자연환경과 자연재해. 동래(東萊)·기장(機張) 등 부산 지역은 한반도의 남동단에 위치하여 부산만을 포함한 리아스식 해안을 안고 있으며, 배후에는 고도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독립적으로 분포하여 해안으로 연결되는 지형적 조건을 띠고 있다. 부산은 온대 계절풍 기후대와 대륙 동안 기후대에 속하며, 해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가 같이 나타난다...
사회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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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 소재한 조선 시대의 유적·유물.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은 대일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이면서 유사시에는 국방의 전초 기지로 활용되는 특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문화재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현재 부산광역시에는 성곽과 성터, 불교 문화재, 유교 문화재, 관아 시설 등의 유적·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성곽으로는 우선 부산광역시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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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의 도자기. 부산 지역의 조선 시대 유적인 절터[寺址], 성터[城址], 무덤, 생활 유적지, 가마터[窯址] 등에서 확인된 도자기는 15~16세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와 17세기의 백자가 대부분이다. 그릇의 종류는 발(鉢), 대접(大楪), 접시(楪匙), 잔(盞), 호(壺), 합(盒), 병(甁), 유병(油甁)[몸통이 탄력 있는 모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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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과 기장군에 있는 조선 시대의 분청사기 가마터. 가마는 흙을 원료로 하여 만든 도자기를 굽기[燔造] 위한 밀폐된 구조물을 가리키는 우리말로, 한자로는 ‘요(窯)’라고 한다.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청자·분청사기(粉靑沙器)·백자를 생산한 가마터는 ‘요지(窯址)’라고 한다. 가마의 종류는 지표면을 기준으로 가마 바닥[窯床] 및 벽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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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옹기. 옹기(甕器)는 진흙만으로 구워 표면에 피막이 입혀지지 않아 테석테석한 질그릇과 질그릇에 오짓물을 입혀 구운 오지그릇의 총칭으로, 주로 조선 시대에 저장 용기로 사용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 옹장의 기록이 있어 정책적으로 옹기장을 두고 옹기를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옹기는 지역마다 형태에 차이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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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소장하고 있는 조선 시대 장신구. 조선 시대에는 복식에 대한 국책상의 제약을 받아 장신구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특히 숭유주의(崇儒主義)는 비(非)중국적인 습속을 극도로 배척하였기 때문에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귀걸이·팔찌 등의 착용(着用) 습속은 거의 사라졌고, 아울러 금은의 사용을 적극 억제하는 시책은 금은 세공 기술을 퇴보시켰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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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인구와 부세, 그리고 신분 변동의 전반을 알 수 있는 사회 구조. 조선 시대 동래·기장 등지의 사회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관련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편이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인구 통계 자료를 통해서, 당시의 사회 구조와 변동에 관해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동래·기장 등지의 부세(賦稅) 관련 자료, 특히 군역(軍役)의 운영 실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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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서 한말까지 부산 지역의 가족 구조. 조선 시대에서 한말에 이르는 동래 지역의 가족 구조를 살펴보기 위해 유용한 자료로는 호적 대장, 호구 단자, 준호구와 같은 호적 문서를 들 수 있다. 동래 지역에는 현전하는 조선 시대 호적 대장은 없고, 신식 호적으로 불리는 『동하면 호적(東下面戶籍)』만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몇 몇 집안을 중심으로 가전되는 호적 문서가 많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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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부산 지역에서 지역민이 믿고 받들었던 신앙. 조선 시대의 신앙은 동래[부산] 지역민이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일체의 총체적인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신앙은 종교적 신앙과 종교 외적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종교적 신앙은 불교·천주교·도교 신앙이 대표적이다. 1740년(영조 16)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 불우조(佛宇條)에 수록된 당시 절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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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조선 왕조 시기 부산 지역에 조성된 무덤. 조선 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규모와 구조에서 차이가 있다. 대개 사대부 이상의 양반층에서는 회널 무덤[회곽묘(灰槨墓)]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반 서민들은 움무덤[토광묘]에 묻혔다. 토광묘는 토광을 파고 직접 시신을 안치하는 경우와 토광 안에 시신을 담은 관을 안치하는 널무덤[목관묘]으로 나누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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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부의 공적 제사 의례와 『주자가례』에 입각한 사적 제사 의례.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동래부에서 공식적으로 거행하는 유교 제사에는 사직을 비롯하여 문묘(文廟), 여단(厲壇), 절영도 신사(絶影島神祠), 고지도 신사(古知島神祠), 충렬사(忠烈祠) 등이 있었다. 조선 왕조의 국가 의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기준으로 하였고, 가정의례는 『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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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서 배의 안전 운항이나 풍어를 기원하며 지내던 제사. 제사는 신령(神靈)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이다. 제사는 대개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행해지는데, 해양 제사는 바로 ‘바다’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행해진다. 조선 시대 부산의 바다는 생활의 공간이자 외국으로 열린 소통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항해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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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온천을 중심으로 한 요양 시설의 운영·이용과 관련된 문화. 조선 시대의 요양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은 온천 시설인데, 동래 온천은 특히 효능이 있는 우수한 온천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동래현(東萊縣)에서 온천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며, 그 뒤 점차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시설이 확충되었다. 조선 시대의 요양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은 온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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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부산 사람들이 먹었던 식품. 동래·기장 등 부산 지역은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하여 부산만을 포함한 리아스식 해안을 끼고 있으며, 배후에는 해발 고도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독립적으로 분포하여 해안으로 연결되는 지형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기후는 온대 계절풍 기후대와 대륙 동안 기후대에 속하며, 해양의 영향을 받아 해양성 기후가 같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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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한말 동래 지역의 주거 문화. 조선 시대 동래에 부임한 부사나 수사는 『가좌책(家座冊)』을 작성해 치민(治民)의 자료로 활용하였다.『가좌책』은 동임(洞任)의 책임 하에 작성하되 호 내 남녀별 인구수·나이·역, 노비 및 고노비의 수·나이·역, 가사(家舍)의 형태와 칸수, 전답의 두락 수, 우마(牛馬)의 필수, 부정(釜鼎)의 좌수,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곡물의 수량 등을 상세...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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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행정 구역과 행정 기구. 조선 건국 초부터 동래부(東萊府)는 동남부의 행정적 중심지일 뿐 아니라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나아가 대일 외교의 창구로서 중요한 위치가 부각되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東萊縣)이 동래 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한 것이나, 1655년(효종 6) 동래부를 경상 좌병영 경주 거진(巨鎭)으로부터 분리해 독진(獨鎭)으로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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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 시대 지방의 행정 단위는 도(道),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이었다. 도에는 종2품의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부에는 부,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부에는 종2품의 부윤(府尹), 대도호부에는 정3품의 대도호부사, 도호부에는 종3품의 도호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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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 도호부를 다스린 정3품의 관직. 조선 전기 태조는 처음으로 동래에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 겸 판현사(判縣事)를 두었다가 뒤에 현령[종5품]으로 바꾸었다. 동래현에는 외관직으로서 현령이 임명되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에서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동래 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가 임명되기 시작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전국의 도호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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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동래구, 남구, 해운대구, 수영구, 연제구, 금정구 지역에 설치된 지방 통치 구역. 동래군(東萊郡)은 757년(경덕왕 16) 지방 행정 제도를 개편할 때 거칠산군(居柒山郡)이 동래군으로 개칭되면서 처음 등장하였고, 고려 시대 이후 동래현·동래 도호부 등 등으로 명칭이 거듭 변경되다가 1914년 지방 제도가 개편될 때 동래군으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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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과 해운대구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동래부(東萊府) 동면(東面)은 조선 초기에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화가 추구되고,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국가의 군현 하부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사회 경제적 사정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천을 거듭하였다. 동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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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와 동구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동평면(東平面)은 조선 후기 동래부(東萊府)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원래 동래부의 속현이었는데, 1428년(세종 10) 동래부에 병합되었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 구획은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촌면(南村面), 동평면, 사천면(沙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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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남구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남촌면(南村面)은 조선 시대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화가 추구되고,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국가의 군현 하부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동래부 남촌면에 관한 대표적인 자료는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의 각면 각리 원근 정도(各面各里遠近程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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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에 있는 덕천동의 조선 시대 이름.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은 숙동 또는 숙등(淑嶝) 마을과 남산정(南山亨), 의성(義城), 기찰(譏察) 마을 등 네 개의 자연 마을로 형성되었다.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에는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살았으며, 덕곡촌(德谷村)이라 불렀다. 낙동강변의 덕천천(德川川) 하구에 자리 잡아 한동안 구법곡(九法谷)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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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북면(北面)은 조선 후기 동래부(東萊府)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18세기 중엽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 구획은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촌면(南村面), 동평면(東平面), 사천면(沙川面), 서면(西面), 북면 등 7개 면과 각 면 아래 모두 22개 동 79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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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 설치된 지방 통치 구역. 사천면(沙川面)은 조선 시대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화가 추구되고,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국가의 군현 하부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사회 경제적 사정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천을 거듭하였다. 19세기에 사상면(沙上面)과 사하면(沙下面)으로 분리되면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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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래구, 북구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서면(西面)은 조선 후기 동래부(東萊府)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 구획은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남촌면(南村面), 동평면(東平面), 사천면(沙川面), 서면, 북면(北面) 등 7개 면과 각 면 아래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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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부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읍내면(邑內面)은 조선 후기 동래부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 동래부의 행정 구획은 읍내면, 동면(東面), 남촌면(南村面), 동평면(東平面), 사천면(沙川面), 서면(西面), 북면(北面) 등 7개의 면과 각 면 아래 모두 22개 동 79개 리로 구성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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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남면(南面)은 기장현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1413년(태종 13)에 읍내면과 함께 동서남북 방위 면의 하나로 만들어졌다. 기장현 남면에 관한 대표적인 기록은 1789년(정조 13)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기장현의 읍면을 “하서면, 중북면, 하북면, 읍내면, 동면, 남면, 상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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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과 일광면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동면(東面)은 조선 시대 기장현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로, 1413년(태종 13) 방위 면의 하나로 제정되었다.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화가 추구되고,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국가의 군현 하부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사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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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상서면(上西面)은 조선 후기 기장군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상서면은 원래 1413년(태종 13) 제정된 기장현 방위 면의 하나인 서면(西面)이었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후에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서면은 동래현에 합속되었고, 1617년(광해군 9) 기장현이 다시 복설되면서 기장현 서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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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기장현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조선 시대의 읍내면(邑內面)은 1413년(태종 13)에 제정된 기장현 동서남북 방위 면의 하나로 만들어졌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 후에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북쪽은 울산의 하미면으로 편입되었고, 남쪽은 동래현에 편입되어 분할되었다. 읍내면은 1617년(광해군 9) 기장현이 다시 복설된 이후 19세기까지 기장현의 면리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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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기장현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하미면(下味面)은 조선 후기 기장군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다. 조선 시대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화가 추구되고,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국가의 군현 하부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 초에 제정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사회·경제적 사정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천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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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기장현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하서면(下西面)은 조선 후기 기장군 산하 행정 구역의 하나이었다. 조선 시대 지방 통치 체제의 정비를 통해 중앙 집권화가 추구되고, 면리제(面里制)를 통해 국가의 군현 하부 촌락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 초에 제정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동래부의 사회·경제적 사정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천을 거듭하였다....
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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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 있던 육군과 수군의 방어 체계와 주요한 성곽. 왜구의 침략이 많았던 부산 지역에는 관방(關防)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육군은 조선 전기에는 동래현(東萊縣)이 경주 진관에 속하였다가 임진왜란 이후 1655년에 동래가 독진(獨鎭)이 되었다. 수군의 경우는 경상 좌수영 아래에 부산포영, 해운포영, 서평포영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경상 좌수영 관할의 대부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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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에 설치되어 경상 좌도의 해안 방어를 맡은 수영.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경상 좌수영]은 현재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서 240여 년간 유지해 온 수군 기지의 본영으로 대일(對日) 관방 체제의 주역이었고, 동래 수영(東萊水營)·영좌 수영(嶺左水營)·내영(萊營)·유영(柳營)으로도 불렸다. 대일 외교의 관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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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상 좌수영을 지휘한 정3품의 무관.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는 경상 좌도의 해안 방어를 총괄하는 직위이었고, 관하에 다수의 변진(邊鎭)을 거느리고 있었다. 몇 차례의 이영(移營)이 있었지만, 군무를 위주로 한 직무상의 두드러진 변화는 보이지 않으며 조선 후기의 선생안(先生案) 분석을 통하여 실태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전기부터 남해안의 방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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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지역의 해안 방어를 위해 경상 좌수영 아래 칠진을 집결시킨 체제. 조선은 일본군의 첫 침략을 받았던 부산 지역에 임진왜란 초기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상도 동해안에 있던 두모포영 등을 옮겨 와서 상당한 군비를 갖추었다. 이후 좌수영 관할 아래의 감포, 축산포, 칠포가 혁파되었다. 이에 조선 후기 좌수영에는 칠진 체제(七鎭體制)가 확립되었다. 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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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지역에 있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 아래 3품의 무관. 조선 전기의 군사 조직은 1466년(세조 12)에 완성된 진관 체제(鎭管體制)로서 전국 행정 단위로서의 ‘읍(邑)’을 동시에 군사 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크기에 따라 주진(主鎭)·거진(巨鎭)으로 구분하고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도 겸하게 하였다. 진관 체제 아래의 수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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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부에 있던 독립 진영(鎭營). 조선 후기 지방군은 진관 체제(鎭管體制)에 바탕을 두었다. 조선 전기에 동래부의 군사권은 경상 좌병영 휘하의 경주 거진(巨鎭)의 첨절제사인 경주 부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동래부의 군사적인 중요성이 재인식되면서 효종(孝宗) 때 독립 진으로 승격되었다. 『효종실록(孝宗實錄)』 효종 6년 1월 2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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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왜구 방어를 위해 설치한 수군첨절제사영. 가덕진(加德鎭)은 조선 시대 가덕도에 왜구 방어를 위해 설치한 수군첨절제사영이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천성보(天城堡)와 가배량성(加背梁城)을 시설하고, 옥포의 지세포·조라포·안골포를 가덕 진관에 속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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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정산성에 있던 조선 후기의 군진. 1704년(숙종 30) 조정에서 금정산성을 지키기가 어려워 별도의 군사 지휘 체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1707년(숙종 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는 전 도사(都事) 최달선(崔達善)을 금정진(金井鎭)의 책임자인 초대 중군에 임명하였고, 중성(中城)을 축조하면서 금정산성을 관리하기 위해 좌기청 6칸, 좌우 행랑(行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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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포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 다대포진(多大浦鎭)은 임진왜란 전 원래 부산 진관에 속해 있던 다대포 만호영이 목도[현 영도]에서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첨사영(僉使營)으로 승격된 것이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보면, 다대포는 부산 진관으로 편제될 때 다대포 만호영이었으며, 무관 종4품이 수장이었다. 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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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부산포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 조선 건국 이후 왜구(倭寇)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아울러 일본인의 거류지인 왜관(倭館)이 부산포(釜山浦)에 설치되자, 일본에 대한 방어와 견제를 하기 위해 부산포에 진성을 설치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조에 “부산포진은 남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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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평포에 있던 진영(鎭營).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에 이어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발생한 후 국방 체제 개편의 필요성이 증대하여 진관제(鎭管制)를 개편할 때 서평포(西平浦)에 진(鎭)이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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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일원 가덕도의 천성에 설치된 경상 우수영 소속의 만호영. 가덕도의 천성진성(天城鎭城) 부근은 부산과 진해 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지로서 예부터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이었다. 세조 때부터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각 지역에 읍성과 진보(鎭堡) 등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에 왜적이 침입[사량진 왜변]하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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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진관 체제에 입각해 부산 지역에 있던 수군만호 진보(鎭堡). 조선 시대의 진관 체제(鎭管體制)는 1457년(세조 3)에 성립되었고, 그 후 약간의 변화를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경기도에는 1명의 전임 수군절도사, 1명의 수군첨절제사, 5명의 수군만호가 있었다. 충청도에는 1명의 전임 수군절도사, 2명의 수군첨절제사, 3명의 수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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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수군 만호영. 조선 시대 좌수영에는 무관 정3품의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가 주재하였고, 그 관하에는 원래 1개의 검사영[거진], 즉 부산포진과 10개의 만호영이 있었다. 다대포[동래]·해운포[동래]·서평포[동래]·두모포[울산]·개운포[울산]·서생포[울산]·염포[울산]·포이포[영해]·감포[경주]·마포[영포]·축산포[영해]·칠포[흥해]가 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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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던 수군 만호영. 조선 전기 왜구 문제 등에 대한 대응 방책 가운데 하나로 수군 진영이 설치되었고, 세종조에 수군 진영의 제장들에게 만호(萬戶) 명칭을 부여하고 수군 만호영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런 과정 중에 울산의 개운포에도 수군 만호영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부산 해안 주변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 1629년(인조 7) 수군절도사영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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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일원에 있던 수군첨절제사의 진영. 조선 시대 다대포에 설치된 수군 만호영을 목도[영도]에 침입한 왜구를 무찌른 공로로 1544년(중종 39) 수군첨절제사의 진영으로 승격시켜 다대포 첨사영(多大浦僉使營)을 설치하였다. 다대포의 수군첨절제사는 무관 정3품의 당상관이었다. 이는 다른 첨사들이 종3품인 점을 감안하면 다대포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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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 있던 수군 만호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건국 직후 두모포 만호영(豆毛浦萬戶營)은 기장현의 동쪽 2.8㎞[7리]에 있었다고 한다. 두모포 만호영은 왜구로부터 기장 지역의 해안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1510년(중종 5) 기장현의 두모포 만호영에 처음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약 378m[1,250척]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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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에 있던 수군만호영. 임진왜란 때 수군의 패배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 좌수영] 관할에 있던 영해 도호부(寧海都護府)의 축산포 만호영(築山浦萬戶營)을 동래부의 남촌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본영의 수장은 만호(萬戶)이었다. 만호 아래에 군관(軍官), 진리(鎭吏), 지인(知引), 사령(使令)이 있었다. 보유한 병선은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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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수군만호영. 임진왜란 때 수군의 패배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경상 좌수영] 관할에 있던 경상도 장기현의 포이포 만호영(包伊浦萬戶營)을 동래부 남촌면으로 옮겨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본영의 수장은 종4품의 만호(萬戶)이었다. 그 아래 군관(軍官) 18명, 진리(鎭吏) 10명, 지인(知引) 9명, 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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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에 있던 전함과 군기를 건조하던 곳. 임진왜란 이후 각 해안 지역에서는 군사 시설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남해안의 군사력 보완을 목적으로 1646년(인조 24) 김해 지역에 김해 부사 이상경(李尙敬)이 낙동강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죽도[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에 대변청(待變廳)을 창설하여 전함(戰艦)과 군기(軍器)를 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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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등에 편성된 승군 부대. 조선 후기 각처의 산성을 비롯한 관방 시설을 방어하는 주요 병력으로 승군이 편제되었다. 먼저 지휘자로 승장(僧將)을 임명하고, 일반 승도(僧徒)로 승병(僧兵)을 조직하였다. 조선 후기 각처의 산성을 방어하는 주요 병력으로 승군 작대(僧軍作隊)를 편제한 일이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산성이나 오지의 관방 시설...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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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교통로상에 세워진 관영 교통·통신 및 숙박 시설. 부산 지역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있어 육상 교통로는 서북 방면으로 발달하였고, 역참 시설도 서쪽 낙동강 너머의 김해와 북쪽의 양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역로망(驛路網)에 소속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 부산 지역에는 금주(金州)[김해]를 중심으로 뻗은 금주도(金州道) 소속의 소산역(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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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황산역을 중심으로 김해·동래·울주·밀양 등지의 인근 고을을 잇는 역로. 황산도(黃山道)는 조선 전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역로이다. 그 가운데 황산도 동로(東路)는 양산군 황산역(黃山驛)[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690번지 서부 포교당 아래 일원]에서 부산으로 연결되는 역로이다. 이 길은 유산역(由山驛)[양산시 유산리 구터]~소산역(蘇山驛)[부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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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있던 조선 시대 낙동강변의 수참. 조선 초기에 낙동강의 동원(東院)에 수참(水站)이 설치되었다. 일본과의 통교(通交)에 낙동강의 수로(水路)는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일본인이 내조(來朝)하여 서울로 갈 때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한강을 따라 한성(漢城)에 다다랐다. 또한 부산포(釜山浦)·제포(薺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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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에 있던 동래 도호부와 기장현의 교통로상의 중간 지점 역참. 신명역(新明驛)의 기능과 관련하여 기장군 철마면 안평리 옆 마을인 6세기 후반~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고촌리 유적(古村里遺蹟)에서 폭 170㎝의 수레바퀴 흔적을 비롯하여 일정한 규모의 노폭과 노면을 갖춘 도로 유구(遺構)가 발굴되었다. 이러한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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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에 설치된 역참. 조선 시대의 아월역(阿月驛)은 고려 시대 아등량역(阿等良驛)의 후신(後身)으로, 역명(驛名)만 달라졌을 뿐 예전 역의 기능은 그대로 수행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기장현에 “역이 둘인데, 아월역과 [기장] 신역이다[驛二 阿月 新驛]”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 기장현 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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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던 황산도의 출발역. 고려 시대 동래현 읍치(邑治)에는 역참 시설이 없었고, 북 8㎞[20리] 지점에 소산역만 위치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와 동래 도호부 읍치에 역참 시설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소산역과 함께 동래신역(東萊新驛)이 확인되는 반면, 14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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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던 교통 편의 시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 기해(己亥)[1899]에 “모이현원(毛伊峴院)은 현의 서쪽 정방리에 있고, 평안원은 현의 남쪽 적석리에 위치한다[毛伊峴院 在縣西鼎方里 平安院 在縣南赤石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모이현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기장현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지리지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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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낙동강 변의 원 시설. 사천원(沙川院)의 사천(沙川)은 고려 시대 이전부터 사천촌(沙川村)으로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오늘날 부산광역시 사상구, 사하구, 서구, 중구, 영도구, 동구 등이 사천면이 되었다. 그 뒤 조선 후기 사천면은 상단(上端)·하단(下端)으로 구분되었고, 1780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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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에 있던,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운영한 숙박 시설. 조선 시대 중요한 교통로, 통신 시설로에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역은 주요 도로 약 12㎞[30리]마다 설치되어 마필과 역정(驛丁)을 두어 공무 여행자에게 말과 숙식을 알선하며 진상 등 관물의 수송을 담당하였다. 또한 공무 담당자가 중앙과 지역을 이동하는 데는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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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운영한 숙박 시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중앙 집권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수도 서울과 지방 사이의 교통·통신이 국가 운영상 긴요하게 되었다. 이에 관한 역할의 일부를 담당한 것이 역(驛)과 원(院)이었는데, 이 중 원은 일반 여객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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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 17세기 초반에 울산군과 기장현의 경계 지점에 해당하는 오늘날 기장군 일광면 원리에 원(院) 시설을 설치하려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일대의 행정 구역 재편성에 따라 원의 설치 공사는 중단되었고, 대신에 그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그 자리가 바로 숙과지(橚菓址)이고, 그곳에 정자나무가 있는 숙과...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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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서 행해진 어로 방법. 부산 지역은 지세가 완만하고 간만의 차가 거의 없다. 해안선이 길고 조류의 흐름이 빨라 그물을 고정시켜 잡는 정치망 어구가 발달하였다. 정치망 어구는 어류가 들어오는 완내 길목 회유로(洄有路)에 설치하였고 모래사장이 있는 곳에는 그물을 던져 끌어당기는 후릿그물 어업을 하였다. 또한 연안 곳곳 바다 속 암석에는 미역밭이 있어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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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와 기장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어구. 조선 영조(英祖) 때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됨에 따라 만들어진 「균역해세(均役海稅)」의 「균역사목(均役事目)」에는 경상도 어업을 어장(漁場)·어조(漁條)·방렴(防簾)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징수하였다. 어장은 후릿그물[휘리선(揮罹船)]·세망선(細網船), 어전(漁箭)은 줄시(乼矢), 장시(杖矢) 및 거망(擧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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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통신사 정사인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의 종자를 구해 와서 부산에 시배(始培)하고 확대 보급한 일. 조엄이 통신사의 임무를 띠고 부산을 떠나 대마도 좌수나포(左須奈浦)에 도착하였을 때가 1763년 10월 6일이었다. 대마도에서 자라나는 감저(甘藷)[고구마]를 보고 몇 말의 종자를 구해서 부산진(釜山鎭)으로 보냈다. 다음해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마도에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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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 부산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목장. 국방상의 목적으로 군용의 말을 기르는 목장은 삼국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174개의 말 목장이 있었다. 관영 목장 뿐 아니라, 귀족·고관들의 사유 목장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현 산천조에, “절영도는 동평현의 남쪽 8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라고 하고, 이어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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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목장. 다대목이 언제 설치되었는지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1673년(현종 14)에 왜관(倭館) 설치를 논의하면서 초량과 다대목이 함께 거론되고 있어 그 이전부터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다대목은 다대포진(多大浦鎭)의 책임자가 관할하던 곳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다대포진이 폐지되면서 다대목의 관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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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를 중심으로 경상도 인근 고을과 이루어진 지역 간의 물화 교류와 교통. 조선 시대 지방에서의 물자 교역은 장시(場市)나 포구(浦口)에서 이루어졌다. 이 교역 공간은 18세기 이후에 크게 발달하면서 오일장으로 체계화되어 전국에 천여 개나 되었다. 이무렵 부산 지역의 오일장으로는 부내장(府內場), 좌수영장(左水營場), 부산장(釜山場), 하단장(下端場), 독지장(禿旨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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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농민, 수공업자, 어염업자들에 의해 생산된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 조선 시대의 부산은 곧 동래부(東萊府)였다. 동래부에서는 일반적인 정기 장시인 5일장을 비롯하여 간혹 부정기적으로 서는 장시도 있었다. 장시는 지방민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열리면서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이나 또는 부업으로 만든 수공업품과 어염 등이 교환 대상이었고, 미포(米布)나 전화(錢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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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기장장(機張場)은 농촌과 어촌이 공존하는 지역 특성으로 산지에서 생산된 농수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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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녹산장(菉山場)은 강서구의 덕두장, 대저장과 함께 농산물을 주로 거래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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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대저장(大渚場)은 강서구의 덕두장(德頭場), 녹산장(菉山場)과 함께 농산물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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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덕두장(德斗場)은 강서구의 녹산장(菉山場), 사덕장과 함께 미나리, 대파,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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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던 덕포 나루에서 조선 후기 열린 오일장. 장시(場市)는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었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열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덕포장(德浦場·德圃場)에 주로 출시되는 상품은 농업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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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독지장(禿旨場)은 좌수영장[5일, 10일], 부산장[4일, 9일], 동래 읍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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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동래 읍내장(東萊邑內場)은 좌수영장[5일, 10일], 부산장[4일,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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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구랑동 압곡 마을에 있던 조선 시대의 5일장. 부산광역시 강서구 지역은 조선 시대의 행정상으로 김해부에 속하였다. 당시 김해부에는 6개의 장시가 있었으며, 그 중의 하나인 반송장은 매월 5일과 10일에 개설되었다. 명칭의 유래는 이곳에 옆으로 뻗친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반송(盤松)’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물산 중에서도 특히 명지도 일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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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일대에서 조선 시대에 열린 오일장. 장시(場市)는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었다. 부산장(釜山場)에서 매매되는 물건은 주로 쌀·보리·콩 등 곡물이 중심이었고, 다음으로 무명·삼베·모시 등 직물을 포함한 수공업품 및 일상용품 등이었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부산포 왜관은 장이 서면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거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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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 도를 넘어서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월내장(月內場)에서는 기장 지역에서 생산되는 미역, 멸치 및 젓갈 등이 거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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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도를 넘어서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좌수영장(左水營場)은 동래 읍내장[2일, 7일], 부산장[4일, 9일], 독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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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좌천장(左川場)은 서면, 김해, 경주, 언양 등지의 장꾼들은 물론 기장, 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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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일대에 개설되었던 오일장. 장시는 상인들과 일반민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다. 지방의 장시는 월 6회씩 5일 간격으로 개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각도를 넘어서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하단장(下端場)은 좌수영장[5일, 10일], 부산장[4일, 9일], 독지장[1일,...
해외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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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왜관에 설치된 조선과 일본 상인들의 무역 장소. 조선 전기 일본과의 무역은 삼포 왜관(三浦倭館)과 서울 동평관(東平館), 삼포에서 서울로 가는 경로에 있는 일본 사절의 숙박지 주변에서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에 일본인의 상경(上京)이 금지되자 일본과의 무역은 모두 부산의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사무역(私貿易)[개시 무역(開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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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동래의 왜관에서 열린 공무역에서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무역품의 대가로 쌀을 지급한 제도. 본래 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지급 결제를 면포로 하여 이를 공목(公木)이라고 불렀다. 조선 정부가 공목의 일부를 1651년(효종 2)부터 공작미(公作米), 즉 쌀로 지급하기로 한 이유는 대마도 측의 요구 때문이었다. 1611년(광해군 3)에 대일 무역이 재개된 뒤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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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과 남포동 일대에서 일본 측이 요구하는 물품에 대해 조선이 유상으로 지급한 무역 제도. 구무(求貿)는 일본의 대마도가 조선과 맺은 전통적인 외교 관계에 근거하여 대마 도주(對馬島主)와 막부(幕府)의 쇼군(將軍) 등이 필요한 물품을 조선에서 조달해 가던 방식이다. 구무는 구청(求請)의 한 형태이다. 즉 일본 측이 요구하는 물품을 조선 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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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과 남포동 일대에서 일본 대마도가 동래 왜관을 상대로 특정 물품을 조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행위. 구청(求請)은 대마도가 조선과 맺은 전통적인 외교 관계에 근거하여 대마 도주(對馬島主)와 막부(幕府)의 쇼군(將軍) 등이 필요한 물품을 조선에서 조달해 가던 방식이다.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 체결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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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왜관을 통해서 조선과 일본이 무역 거래를 할 때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 진 빚, 즉 왜채(倭債). 노부세(路浮稅)는 글자만 놓고 보면 세금의 일종으로 오해받기 쉽다. 실제로 어떤 자료에는 이것을 가리켜 ‘여비로 거두어 주는 돈’으로 풀이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또 어떤 자료에는 이것을 ‘구전’이나 ‘수수료’, ‘중개료’ 정도로 해석되는 커미션(com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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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왜관에서 이루어진 조일 무역에 참가하는 상인의 수에 대한 시행 규칙. 조선 후기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부산의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무역은 공무역, 사무역, 밀무역 등으로 구분된다. 공무역은 국가의 주체로 이루어지는 무역이며, 사무역은 정부가 허락한 상인이 대마도와 거래하는 것을 말하며, 밀무역은 정부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행위이다. 사무역은 왜관의 개시 대청(開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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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 왜관에서 일본과의 개시 무역을 담당한 무역 상인. 동래 상인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살펴볼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동래 상인은 동래 출신 상인, 또는 동래 지역을 근거로 활동한 상인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동래 지역에서 활동한 상인에는 동래 출신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신지보다는 활동지를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동래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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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 지역에서 인삼 등 약재의 안정적 확보와 조달을 위해 설립된 계(契).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59년(효종 10) 2월 8일조에 의하면, “각 시장과 각 마을에 사약계(私藥契)가 사기 쳐서 이익을 도모하는 자가 매우 많아 혜민서와 전의감에서 약을 파는 규칙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이에 약 값이 크게 올라 그 폐해가 적지 않으니, 각 아문의 약방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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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왜관이나 일본 대마도 같은 지역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일어난 불법 거래.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경우 국가가 대외 무역을 독점하였다. 외국으로 건너가거나 외국에서 온 사람들과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는 그 나라 정부가 파견한 사신(使臣)이나 국가의 허가를 받은 일부 상인(商人)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 무역을 통해서 얻는 이익이 컸기 때문에, 국가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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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로부터 특별히 허가를 받은 상인들이 왜관으로 들어가 대마도에서 파견되어 온 대관들과 거래하는 교환 행위. 조선 시대에 외교 업무를 관장하였던 예조(禮曹) 전객사(典客司)에서 편찬한 『변례 집요(邊例集要)』를 보면, 개시가 대일 외교와 무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즉 이 자료집의 제8권 공무역(公貿易)·하납제절(下納諸節)에 이어서, 제9권에 개시·조시(朝市)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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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밀무역, 또는 밀무역 상인. 조선 전기부터 대일 무역은 공무역과는 별도로 사무역도 발달했는데, 사무역의 발달로 밀무역이 발생하는 폐단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러자 1457년(세조 3)과 1485년(성종 16)에 밀무역을 근절하고자 사무역 금지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교역은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된 이후...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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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낙동강 변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조창. 『숙종실록(肅宗實錄)』 권54 숙종 39년 8월 11일 기사에 “또한 금정산성의 서문(西門) 밖은 바로 양산 땅인데 감동창(甘同倉)이 그곳에 있고, 창 밑에 사는 사람이 300여 호(戶)나 되게 많으니[且城之西門外 卽梁山地也 甘同倉在於其處 而倉底居民 多至三百餘戶]”라고 기록되어 있고,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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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 조선 시대 지방의 세곡을 운반하는 제도가 조운제(漕運制)이며, 이를 위해 각각의 창고 역할을 하는 것이 해창(海倉)이었다. 『기장읍지(機張邑誌)』[필사본, 고종 연간]의 창고(倉庫)조에 의하면, 기장 해창(機張海倉)은 읍 중심의 관문(官門)에서 20리 거리의 중북면(中北面)에 있다고 되어 있다. 또 「1872 군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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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지역에 있던 동래부 소속의 창고이자 무역 기구. 부창(釜倉)은 왜관의 일본인에게 제공되는 공작미(公作米) 등 각종 곡식을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창고이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759·1832·1871], 『변례 집요(邊例集要)』,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872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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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장산에서 시행된 조선 후기 목재 벌채를 금지한 법령. 봉산(封山)은 금산(禁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부터 주로 봉산이라 불렀다. 봉산이란 소나무 숲이 울창한 지역 중에서 군사상 요지, 수로 운항이 쉬운 곳, 포구를 낀 해안, 왕자의 태를 묻은 산 등에 지정하여 목재 벌채를 금지한 곳이다. 봉산을 지정하는 목적은 사적인 채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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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에 설치된 군수 물자와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죽림 마을에 1646년(인조 24) 전함(戰艦)과 군비(軍備)를 갖춘 대변청(待變廳)이 설치되었고, 여기에 주둔하는 수군들의 군기(軍器)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1649년(효종 즉위년) 김해 부사 박경지(朴擎祉)가 해창(海倉)을 세웠다. 『김해읍지(金海邑誌...
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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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기장현 남면에 설치되어 빈민을 구휼하던 곡물 대여 기관 및 제도. 조선 시대 기장현 남면[관문에서 6㎞ 지점]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곡식을 진대(賑貸)하여 농민을 구휼하고 유망(流亡)을 막으면서 농업 재생산을 돕는 기능을 하였다. 기장현에는 남면 외에 상서면, 동면, 읍내면, 하북면 등지에 사창이 설치되었다. 기장현 남면 사창(機張南面社倉)은 기장의 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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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기장 각 면에 설치된 빈민 구휼을 위한 곡물 대여 기관 및 제도. 조선 시대 기장현의 상북면, 하북면, 상서면, 동면, 읍내면, 남면 등지에 설치된 창고로서 곡식을 진대(賑貸)하여 빈민을 구휼하여 농민의 유망(流亡)을 막고 농업 재생산을 돕는 기능을 하였다. 사창(社倉)은 조선 시대 군현 단위로 있던 관설(官設)인 의창(義倉)의 역할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를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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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 기장에 설치하여 빈민을 구휼하던 곡물 대여 기관 및 제도. 조선 시대 기장현 상서면(上西面)[관문에서 7리 지점]에 창고를 설치하고 그 곡식을 진대(賑貸)하여 농민을 구휼하고 유망(流亡)을 막으면서 농업 재생산을 돕는 기능을 하였다. 기장현에는 상서면 외에 하북면, 동면, 읍내면, 남면 등지에 사창(社倉)이 설치되었다. 기장현 상서면 사창(機張縣上西面社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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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기장현 읍내면에 설치되어 빈민을 구휼하던 곡물 대여 기관 및 제도. 조선 시대 기장현 읍내면[관문에서 1.2㎞ 지점]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곡식을 진대(賑貸)하여 농민을 구휼하고 유망(流亡)을 막으면서 농업 재생산을 돕는 기능을 하였다. 기장현에는 읍내면 외에 상서면, 동면, 하북면, 남면 등지에 사창이 설치되었다. 기장현 읍내면 사창(機張縣邑內面社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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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기장현 하북면에 설치되어 빈민을 구휼하던 곡물 대여 기관 및 제도. 조선 시대 기장현 하북면[관문 밖 12㎞ 상곡리 소재로 추정]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곡식을 진대(賑貸)하여 농민을 구휼하고 유망(流亡)을 막으면서 농업 재생산을 돕는 기능을 하였다. 기장현에는 하북면 외에 상서면, 동면, 읍내면, 남면 등지에 사창이 설치되었다. 기장현 하북면 사창(機張縣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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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일본 등 외국 사절을 응대하기 위해 동래 왜관에 파견된 3품의 관직. 조선 전기에는 중국, 일본, 여진, 류큐[琉球] 등의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각 나라 사절에 대한 접대 의례는 조금씩 달랐으며 사절을 응대하는 외교 관리의 명칭도 달랐다. 원접사(遠接使)·접반사(接伴使)·영위사(迎慰使)·선위사(宣慰使) 등을 임시로 뽑았고, 이들은 조선 국경에 나아가 외국 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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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전쟁 양상.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왜구(倭寇)의 침입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에 부산에서 발견되는 무기를 통해 전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경우는 삼포 왜란과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조총(鳥銃)을 사용하여 조선 군민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는 동래구 수안동 부산 도시 철도 4호선 공사 현장에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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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조선 시대 무기.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의 무기가 서로 비교되는 전쟁이었다. 조선은 북방 여진족의 기병 전술에 대항하는 장병(長兵) 전술에 치중한 결과 일본군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무기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궁시(弓矢) 위주의 종래 무기 체계에서 조총을 중심으로 창검과 궁시가 보조하는 전술로 전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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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부산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 벌인 전쟁으로, 1597년[정유년]에 일본군이 다시 침입한 전쟁을 구분하여 ‘정유재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진 앞바다에 침입하여 다음날에 부산진성을 침략하였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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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년 왜적이 동래 가덕도에 침입한 사건. 조선 시대에 왜관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초라고 한다. 왜관이 많을 때는 조선의 수도 한 곳 즉 동평관(東平館)과 경상도 연안의 항구 세 곳을 포함해서 모두 네 군데에 설치된 적도 있었다. 진해의 내이포(乃而浦) 즉 제포(薺浦)와 부산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를 통칭해서 ‘삼포 왜관’이라 불렀다. 조선 정부는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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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 4월 대마도 왜인들이 사량진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 1510년(중종 5) 삼포 왜란을 계기로 부산포 등 삼포(三浦)를 폐지하였으나, 왜인의 요청으로 1512년에 임신조약을 체결하여 다시 통교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임신약조로 세견선이 210여 척에서 60여 척으로 줄어드는 등 왜인에 대한 통제가 엄격해지고 교역의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세견선을 늘려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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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9월 1일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둔 해전. 조선 수군은 부산성 동쪽 언덕 밑 3개소에 일본군선 약 470여 척을 맞아 하루 종일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3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깨트리는 전과를 거두었다. 부산포 해전 직전에 경상 우도 순찰사 김수는 공문을 보내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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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벌어진 전투.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지킨 정발(鄭撥) 장군의 군사와 침략군 일본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싸운 최초의 전투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침략한 일본군은 4월 14일 부산진성을 공격하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휘하의 군사들은 결사 항전하였으나, 대규모 일본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여 오전 중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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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부산 동래 읍성에서 벌어진 전투. 동래 읍성 전투는 임진왜란 때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사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사가 동래 읍성에서 싸운 전투이다. 부산진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4월 14일 오후 동래로 진격하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과 군·관·민은 격렬하게 항쟁하였지만, 일본군의 대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래 읍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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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부산 다대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1592년 4월 15일에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의 군사와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사가 다대진성에서 싸운 전투이다. 다대포가 외떨어진 곳이어서 전투의 상황이 늦게 알려졌다. 다대진의 군·관·민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의 해안 방어 세력을 제거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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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부산의 좌수영성 일원에서 전개된 이 지역 의병들의 유격전. 경상 좌수영의 본영인 수영성을 중심으로 7년간에 걸쳐 지역민들이 앞장서서 지속적으로 싸운 전투로,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에 남은 민초의 삶이 생생하게 담긴 전투이다. 임진왜란의 개전 초기, 부산 지역의 대표적 전투인 동래성과 부산진성 전투가 관민의 합심으로 이뤄진 항쟁으로 역사 기록 속에 남은 데 비...
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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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년 10월 부산 지역에 표착했던 이양선 사건. 이양선(異樣船)은 모양이 동양 세계의 배와 달리 특이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황당선(荒唐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황당선의 표착은 1540년(중종 35) 1월 19일 황해도 부근에 나타난 것이 처음이다. 이양선의 표착은 1794년(정조 18)에 “이양선이 표류하여 호서의 마량진(馬梁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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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표착한 일본인 또는 일본으로 표류한 조선인. 동력을 사용하는 근대의 선박이 나오기 전 상업, 무역 등의 이유로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은 해류나 갑작스런 기후 변화 등으로 표류·표착하는 일이 많았다. 표류민(漂流民)은 전근대 어느 시대나 발생하는 문제였으나, 표류민 송환이 하나의 외교 시스템으로 정비되는 시기는 조선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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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동래의 왜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중국과의 간접적인 교류 활동. 조선 시대에 동래 지역이 중국과 직접 교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간접적으로 교류가 가능하였다. 조선 후기에 조선이 청(淸)과 교류하는 통로는 사행(使行)[사절]이었다. 조선에서 명(明)에 가는 사절을 조천사(朝天使)라 한 데 비해, 청에 가는 사절을 연행사(燕行使)라 불렀다. 조선 후기 동래 왜관에서 이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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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동래의 왜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과의 교류. 조선 시대에 동래 지역에서의 일본과의 교류는 왜관(倭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지금의 진해[당시 웅천]에 위치한 제포[내이포] 왜관이 부산포 왜관보다 비중이 컸다. 그리고 상경한 일본 사절은 동평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사량진 왜변 이후 폐쇄된 삼포 왜관은 1547년(명종 2) 정미약조(丁未約條) 체결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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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에 있던 동래부 소속의 서계 담당 기관.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국서(國書)와 서계(書契)라는 두 종류의 외교 문서가 교환되었다. 서계는 외교 실무 부서인 조선의 예조, 동래 부사, 부산 첨사와 일본의 대마 도주, 만송원(萬松院), 이정암(以酊庵) 등 사이에 교환된 문서이었다. 서계소(書契所)는 서계를 관장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한다. 서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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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일본 막부가 조선과 주고받는 외교 문서를 통제하기 위하여 시행한 제도.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조선과의 외교 및 무역 업무를 대마도(對馬島) 즉 쓰시마 번[對馬藩]이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정암(以酊庵)은 교토(京都)에서 대마도로 파견된 승려들이 머물던 절이었다. 이정암은 1580년(선조 13) 일본 하카타(博多) 세이후쿠지[聖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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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에 있던 일본인이 상주하던 건물 또는 마을. 우리나라에 왜관이 언제 처음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시대에는 김해[지금의 강서구 녹산동 일대]에 일본 사절이 머무는 객관(客館)이 있었다. 객관은 왜관의 기능을 일부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 7)에 동래 부산포[현 동구 범일동, 좌천동 일대]와 웅천 제포[내이포, 지금의 창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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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동구 구청로에 있던 왜관. 두모포 왜관(豆毛浦倭館)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에 이은 세 번째 왜관으로, 규모는 약 3만 3058㎡[1만 평]이었다. 조선 후기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되던 곳으로 대마도에서 온 500여 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였다. 전체 왜관의 경관은 왜관 동문(東門) 밖에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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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부산포에 설치된 왜관. 조선이 건국된 뒤 대일(對日) 외교의 현안은 왜구 처리에 관한 문제이었다. 왜구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책은 강력한 응징과 아울러 무역을 허락함으로써 점차적으로 평화로운 통교자로 전환하려는 것이었다. 사절로 파견된 왜인과 무역을 위해 오는 왜인, 조선인으로 귀화한 왜인 등의 형태로 조선에 온 일본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1410년(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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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동 2가에 있던 왜관. 절영도 왜관(絶影島倭館)은 1601년(선조 34)경 설치되어 1607년(선조 40) 두모포로 왜관이 이전될 때까지 사용된 일본 사절의 숙소이자 조일 무역이 행해진 곳이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 사이의 관계 회복 노력은 일본이 사절을 먼저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600년(선조 33) 8월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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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대청동 일대에 있던 왜관. 초량 왜관(草梁倭館)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이다. 조선 후기 왜관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으로 대마도에서 온 500여 명의 성인 남성이 거주하였다. 조선 전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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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에 있던 동래부에서 타지로 나가는 길목의 검문소. 조선 시대 부산의 동래부에서 타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나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래에서 양산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부산 지역은 옛날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으로, 특히 1407년(태종 7) 부산포 왜관 설치 이후 왜인들의 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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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조선 정부가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왜관 밖으로 나가는 행위. 왜관 운영의 실태와 조선 후기 한일 관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용어이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외교나 무역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에는 통상적으로 조선 정부가 파견한 왜학 역관[훈도·별차]이 왜관에 들어가서 관수, 대관 및 재판 등과 협의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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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중구 대영로에 있는, 조선 후기 일본 사절이 조선 왕에게 숙배례를 거행하던 장소. 조선 전기 일본과의 외교는 궁궐과 일본 사절의 숙소인 서울 동평관(東平館)에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외교 문서와 예단, 회답 문서와 회례품(回禮品)이 오갔다. 조선 후기에는 일본인의 상경(上京)이 금지되자 일본과의 외교는 모두 부산[동래]에서 이루어졌다. 사절이 도착하면 우선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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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중구 영주1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훈도 청사. 1730년(영조 6)에 완성된 성신당(誠信堂)은 그 건물 자체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조선 조정이 1678년(숙종 4)에 옮겨서 설치한 초량 왜관(草梁倭館)에다 18세기에 이르러 교린 외교를 시행하기 위한 각종 시설을 정비하는 한편, 왜관에 체류하는 쓰시마 인들의 약조에 어긋난 행위를 억제하려는 흐름 속에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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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대일 기본 정책인 교린의 실현을 위해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 조선의 외교 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곧 중국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명(命)에 순응하는 예의로 ‘사대’를, 일본에는 신의(信義)와 인도(仁道)에 바탕을 둔 대등의 예의로 ‘교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는 역사적·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한 것으로, 대륙과 해양의 군사적 위협을 막고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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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왜학 역관인 훈도와 별차를 보좌하던 동래부 소속의 하급 역관. 17세기 이후 동래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대일(對日) 교섭의 창구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웅천, 동래, 울산에 있던 왜관(倭館)이 17세기 이후에는 동래부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동래부의 대일 교섭 업무를 위해 서울에서 일본어 통역관, 즉 왜학 역관(倭學譯官)인 훈도와 별차가 파견되었다. 이들은 왜관의 일본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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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 왜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사인 대감동과 소감동을 관장하던 왜학 역관. 1607년(선조 40)에 설치된 두모포 왜관은 입지 조건상 결함이 많아 대마번은 일찍부터 조선 측에 개축과 증축을 요구하였다. 대마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는 1644년(인조 22) 관수 후루카와이메몽[古川伊右衛門]을 통하여 노후하여 보수가 필요하다는 뜻을 조선 예조에 전하였고, 예조는 이듬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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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 왜관과의 통역 및 왜학 생도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관인.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자(使者)의 상경(上京)이 불허되었고, 왜관 범주에서 양국 간의 외교·무역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조선 정부는 사역원에 속하여 일본어의 통역과 교육을 맡아 보던 왜학훈도(倭學訓導)를 동래부에 파견하였다. 17세기 이후 동래부와 왜관 간의 의사를 중개하고, 양국 간의 사안을 교섭한 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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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외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부산 왜관에 파견된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 차왜(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이나 대마 도주의 죽음, 승습(承襲),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의 파견 요청, 호행·호환 및 두 나라 사이의 주요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의 통칭이다. 차왜는 담당 업무의 중요도에 따라서 대차왜와 소차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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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부산 왜관에 온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 차왜(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이나 대마 도주의 죽음, 승습(承襲),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의 파견 요청, 호행·호환 및 두 나라 사이의 주요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의 통칭이다. 관백 승습 고경 차왜(關白承襲告慶差倭)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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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통신사행을 호위하고 일본에 가기 위해 부산 왜관에 온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 차왜(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이나 대마 도주의 죽음, 승습(承襲),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의 파견 요청, 호행·호환 및 두 나라 사이의 주요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의 통칭이다. 신사 영빙 차왜(信使迎聘差倭)는 조선 국왕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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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통신사행을 호위하고 부산 왜관에 온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 차왜(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이나 대마 도주의 죽음, 승습(承襲),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의 파견 요청, 호행·호환 및 두 나라 사이의 주요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의 통칭이다. 신사송 재판 차왜(信使送裁判差倭)는 조선 국왕이 일본 최고 통치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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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통신사행의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부산 왜관에 온 일본의 임시 외교 사절. 차왜(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이나 대마 도주의 죽음, 승습(承襲),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의 파견 요청, 호행·호환 및 두 나라 사이의 주요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에 파견한 임시 외교 사절의 통칭이다. 통신사 청래 차왜(通信使請來差倭)는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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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동래 부산포 왜관을 중심으로 대일 관계 업무에 종사한 현지 출신 하급 역관. 조선 전기 역관은 근무지에 따라 서울에서 활동하는 중앙 역관과 지방에서 활동하는 외임(外任) 역관으로 구분된다. 외임 역관은 지방의 주요 지역에 1명씩 파견되었다. 외임 역관의 파견은 세종 때 본격화하여 성종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외교 업무와 관련된 일을 외임 역관이 모두 담당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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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조선이 일본에서 보낸 국서에 회답 국서를 전하고 피로인을 쇄환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파견한 사절.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일(朝日) 양국 간의 통교 관계를 회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강화 교섭은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대마도(對馬島)의 실리가 맞물리면서 빠르게 진척되었다. 먼저 1604년(선조 37) 승려 유정(惟政)과 손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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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왜관을 통해 대마도로 파견된 조선의 외교 사절. 조선 후기 일본을 왕래한 사절로는 ‘통신사행’이 있다. 조선 국왕이 일본 최고 통치자인 관백(關白)[막부 장군]에게 보낸 외교 사행(使行)은 관백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의 에도[현 도쿄]를 왕래하였다. 총 12회 파견된 것으로 알려진 통신사행 이외에도 조선 정부는 대마도에 조선 후기에 모두 54회에 달하는 문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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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 거류한 왜인. 조선 초기 다양한 왜구 대책의 실시로 왜구의 침입은 감소한 반면에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도항하는 통교 왜인은 증가하였다. 그러나 통교 왜인의 증가에 따른 치안·경제상의 폐단이 발생하자 1407년(태종 7)에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왜인들이 정박할 수 있는 포소를 부산포와 제포(薺浦)로 제한하였다. 그 후 왜인의 요구로 내이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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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해마다 부산 등 조선을 오가며 무역에 종사하던 일본인. 왜구는 고려 말부터 큰 피해를 입혔는데, 조선 건국 이후에도 수적으로는 감소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해안가를 중심으로 출몰하고 있었다. 조선 정부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군 강화·외교 교섭·회유책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고, 그 결과 왜구는 점차 사송 왜인(使送倭人)·향화 왜인(向化倭人)·흥리 왜인(興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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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조선 시대에 귀화한 왜인. 고려 시대 향화 왜인(向化倭人)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999년(목종 2)에 일본국 사람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내투하자, 이들을 이천군(利川郡)에 살게 하고 편호(編戶)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향화 왜인은 많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1395년(태조 4) 1월에 왜인 표시라(表時羅) 등 4명이 투항해 온 이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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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동래부가 조선을 왕래하던 왜인에게 지급한 급료. 왜료(倭料)는 조선 시대에 동래부가 왜관(倭館)에 주재하는 왜인에게 과해미(過海米)와 유포미(留浦米) 등으로 일정 부분 지급하던 비용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왜료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60년(세조 6)이다. 조선을 방문한 왜인들은 짧게는 2, 3개월, 길게는 거의 1년 정도 체류하였다. 이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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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삼포, 특히 부산포에서 항거 왜인이 거주한 마을. 고려 말부터 극심한 피해를 입혔던 왜구는 조선 건국 이후 적극적인 왜구 금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점차 사송 왜인·흥리 왜인·향화 왜인 등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고 특별한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수천 명의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와 여러 곳에서 무질서하게 머무는 상황이 되자, 조선에서는 이들을 한 곳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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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부산포 등 삼포에 도항하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세견선(歲遣船) 통제에 관하여 맺은 조약.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다양한 왜구 대책을 실시한 결과 1401년(태종 10)을 전후로 왜구는 감소하였지만 일본으로부터 도항하는 통교자는 증가하였다. 그러나 통교자의 증가에 따른 치안상의 문제점과 재정적 부담이 증가하자 이들에 대한 통제를 제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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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에 왜관의 관수(館守)가 왜관 운영과 관련하여 맺기를 요청한 약조. 관수왜 청신 약조(館守倭請申約條)는 약조라는 명칭을 띠고 있고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권4 약조(約條) 편에 수록되어 있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왜관의 관수가 약조 맺기를 요청한 내용이다. 조선 시대 대일 관계(對日關係)와 관련된 약조를 수록한 『통문관지(通文館志)』와 『변례 집요(邊例集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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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년에 동래부와 왜관 사이에 체결된 조선인 상인의 왜관 출입을 규제하는 조약. 금산입각방 약조(禁散入各房約條)는 개시 무역의 관례를 무시하고 감시원의 눈길이 미치지 않은 관내의 방에 들어가 매매하는 형태를 근절하기 위하여 1653년(효종 4) 동래 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관수(館守) 히라타[平田齊宮]와 협의하여 맺은 조약이다. 원래 개시 무역은 조선의 훈도(訓導)·별차(別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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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에 있었던 조선·일본 양국 교역 업무의 개정 약조.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교역은 1609년(광해군 1) 기유 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면서 재개되고, 1630년대 겸대제(兼帶制) 실시로 통교 무역에 관한 틀이 개편·재정비되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역과 왜관 수리 등의 여러 측면에서 폐해가 발생하면서 조선의 경제적인 부담은 증가하였다. 조선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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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동래 왜관 체류를 비롯한 조선과 일본 간의 기본 약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일본의 국교 재개 요청에 따라 조선은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군민(君民)의 정서를 고려한 명분에 입각한 국교 교섭을 위해 ① 막부장군의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② 왜란 중 왕릉을 발굴한 범릉적(犯陵賊)을 압송해올 것 등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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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에 왜관에서 일어난 교간 사건의 일본인 관련자를 조선인과 같은 형벌로 처벌할 것을 규정한 조약. 임진왜란 이후 왜관의 위치는 1609년(광해군 1)에 두모포에 신축하여 통교 업무를 보았고, 1678년(숙종 4)에는 초량으로 이전하여, 이후 1872년(고종 9) 메이지[明治] 정부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195년간 존속하였다. 왜관의 기능이 부활되자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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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 남성과 조선인 여성 사이에 일어난 매춘 사건. 『변례 집요(邊例集要)』에 의하면 조선 후기 왜관에서 발생한 교간 사건은 총 9회에 달한다. 이 중 1661년과 1662년의 두 사건은 두모포 왜관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 7건은 초량 왜관에서 일어났다. 물론 이 9건이 왜관에서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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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일본과 조선 사이에 조선 표류민의 처리 규정을 정한 약조. 1801년(순조 1) 대마도(對馬島)에 표착(漂着)한 동래부 사람 6명 중 1명이 익사하였는데, 그 시신을 바다에서 건지지 못하고 일본 사절이 나머지 표류민(漂流民)만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조선에서는 이 일을 두고 표류민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오는 사절에 대해서는 접대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약조를 다시 정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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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 조선인 여자와 일본인 남자의 교간(交奸)에 대한 처벌 규정을 수록한 약조. 1707(숙종 33)년 왜관의 경계를 담당하던 군인[직위는 부장(部將)] 송중만(宋中萬)이 초량촌에 살던 감옥(甘玉)이란 여성을 일본인과 교간(交奸)하도록 하였다. 이 일이 발각되자 조선에서는 감옥과 송중만을 사형에 처하고 일본인 남성을 동률(同律)로써 처벌하도록 왜관 측에 요청하였다. 왜관 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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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효종 4) 부산 왜관의 관수(館守)와 대관(代官)이 작성한 왜관 체류 일본인의 준수 사항. 『변례 집요(邊例集要)』 권5 약조에는 ‘왜인금조(倭人禁條)’로 되어 있으며 “2월 본부[동래부]에서 금조(禁條)를 정하여 치계(馳啓)하였는데, 조정(朝廷)에서 강정(講定)하여 반하(頒下)한 후 왜인이 이 금조를 추정(追定)하였다.”고 부기되어 있다. 그리고 권9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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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부산포를 비롯한 삼포 지역에서 발생한 왜변 이후, 1512년 대마도와 조선 사이에 재통교를 목적으로 체결한 약조.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을 비롯한 삼포 왜관 지역에서 왜란이 발생하면서 조선은 삼포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경제적으로 곤란함을 겪게 된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일본 국왕 명의의 사신을 파견하여 교역 재개를 요청해 왔고, 당시 북방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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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진 왜변 이후 중단된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면서 1547년 부산포 왕래만을 허용한 조약. 1544년(중종 39)에 발생한 사량진 왜변을 계기로 임신약조(壬申約條)를 파기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일본 정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와 규슈[九州]의 유력 호족 쇼니씨[少二氏]가 대마도 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해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국왕사(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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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초량 왜관 이전 후 왜관의 통제와 체제 정비를 위하여 동래 부사 이복(李馥)과 관수(館守)가 협의하여 정한 약조. 왜관은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의 거류지이자 조선·일본 양국 간의 외교와 무역의 장으로서 기능하였다. 왜관이 설치된 이후 왜관 실무자 선에서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통제책이 강구되고 실시되었지만 조선·일본 간의 외교·무역, 일본인들의 왜관 체류 과정에서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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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 동래 부사와 쓰시마 번[對馬藩]이 조선 표류민(漂流民)의 시신 처리에 대해 맺은 조약. 표인 시신 물송 차왜 조약은 쓰시마 번이 표류민 시신을 같은 표류민에게 인도하여 도해시키거나 연례 송사(年例送使) 편에 태워 보내지 않고 별도로 차왜(差倭)를 보내는 행위를 근절할 목적으로 1696년(숙종 22)에 체결된 조약이다. 1645년(인조 23)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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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에 있던 왜관에서의 밀무역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시행 규칙. 『효종실록(孝宗實錄)』 3년[1652] 9월 신묘[22일] 기록에 왜관(倭館)에서 이루어지는 개시 무역(開市貿易)은 조선, 일본의 관리와 상인이 대청에서 하는 것이 정례화되어 있는데, 1637년(인조 15) 이후에는 정해진 무역 장소가 아닌 일본인의 방에 들어가 밀무역을 하고, 조선인이 일본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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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초량 왜관 등지에서 행해지는 삼의 불법적인 유통을 막기 위해 마련한 시행 규칙. 금삼 절목(禁蔘節目)은 숙종 때 처음 마련되었으며, 그 취지는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삼을 채취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당시의 삼은 모두 산삼, 자연 삼으로 아직 재배 삼이 생산되지 않는 시기이었다. 대외 무역에서 중요한 무역품으로 자리 잡고, 국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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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공작미와 관련한 시행 규칙. 1738년(영조 14) 동래 부사 구택규(具宅奎)는 부산 초량 왜관에서 진행되는 외교, 무역, 교류 등과 관련하여 왜관 운영에 전반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변문 절목(邊門節目)을 초안하고 이를 조정에서 승인받아 공포하였다. 변문 절목 조항 가운데에는 공작미(公作米) 지급 및 공작미 운반을 담당하는 운미 감관(運米監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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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초량 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접촉 및 교류를 통제하기 위해 제정한 시행 규칙. 조선 후기 동래부에 있던 왜관이 절영도, 두모포, 초량으로 이전되면서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407년(태종 7) 이후 부산에 왜관이 존속하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접촉 및 교류를 하는 조선인이 늘어나자 조선 조정에서는 왜관 출입, 접촉 금지 등의 통제책으로 왜관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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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일본에 지급하는 쌀의 조달과 관련한 폐단을 금하는 규칙. 조선 후기 한·일 관계가 재개되면서 공무역 수입품을 일정한 비율로 환산하여 목면(木棉)이나 쌀로 바꾸어 지급하였다. 처음에는 목면을 지급하였으나 목면의 품질이 균일하지 않기도 하고 대마번의 요구가 있어 쌀로 바꾸어 주었다. 이를 공작미(公作米)라 한다. 공작미 제도가 시행된 때는 1651년(효종 2)부터이다.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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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초량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왕래할 수 있는 경계를 규정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 1678년(숙종 4) 4월 14일 새 왜관(倭館)인 초량 왜관이 완공되어 489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부산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이주하였다.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한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인과 일본인 간의 밀무역, 정보 누설 등 불법적인 접촉·교류를 막아 왜관 운영에 쇄신을 가져오겠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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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과 남포동에 있던 왜관에서 열린 개시 무역에 관하여 조선 정부가 정한 규칙. 1678년(숙종 4) 초량(草梁)으로 옮긴 왜관(倭館)을 가리켜 신관(新館)이라 불렀다. 그 전에 두모포(豆毛浦)에 있던 왜관을 고관(古館) 또는 구관(舊館)이라고 하였다. 고관에서도 개시(開市)가 열렸는데,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적은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개시 장소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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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지역에 있던 초량 왜관의 임역 및 왜인의 출입을 규제하기 위한 규정. 왜관(倭館) 운영상 조선인과 일본인의 왜관 출입이 잦아지면서 이들의 불법적인 접촉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683년(숙종 9)에는 동래부의 출입 허가를 받은 훈도와 별차 이외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또한 초랑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봄가을 이외에 며칠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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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산 초량 왜관 관수와 협상한 차왜의 도해 금지 규정. 표인 영래 차왜(漂人領來差倭)[일본에 표류하게 된 조선 사람들을 인솔하여 데리고 온 왜인]의 폐단은 쓰시마 번이 연례 송사 편에 태워 도해(渡海)시키지 않고 차왜를 보내 송환하는 것이었다. 연례 송사 편에 보내면 인원 몇 명을 접대하는 정도이었지만, 차왜를 보내면 격군(格軍)이 40명이었고 왜관(倭館)에 체류하는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