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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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의미역 | Tombs of the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영민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조선 왕조 시기 부산 지역에 조성된 무덤.
[개설]
조선 시대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규모와 구조에서 차이가 있다. 대개 사대부 이상의 양반층에서는 회널 무덤[회곽묘(灰槨墓)]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반 서민들은 움무덤[토광묘]에 묻혔다. 토광묘는 토광을 파고 직접 시신을 안치하는 경우와 토광 안에 시신을 담은 관을 안치하는 널무덤[목관묘]으로 나누어진다.
사대부들의 무덤은 일정한 묘역을 갖추고 무덤 앞에 상석과 함께 비석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무덤의 앞에 세우는 비석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한자는 공(公)[관직을 역임한 양반의 높임을 뜻하는 접미사], 휘(諱)[죽은 어른의 생전 이름], 학생(學生)[생전에 벼슬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의 존칭] 등이 있다.
[부산 지역의 무덤]
기장 지역에는 임진왜란 이후 벼슬을 추증한 사대부들의 무덤과 특정 가문의 집단 무덤이 다수 확인된다. 이외에도 비석과 함께 봉분이 남아 있는 별도의 무덤들도 각지에서 조사되었다. 이들 묘는 대개 널무덤으로 추정되지만 이중 다수의 무덤은 회널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봉분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무덤의 흔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봉분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에는 주로 발굴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기장 지역에서 발굴된 조선 시대의 무덤으로는 정관읍의 방곡리 유적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방곡리 유적에서는 모두 197기의 조선 시대 무덤이 발굴되었다. 무덤은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시신을 목관에 담아 안치한 널무덤의 형태였다. 하지만 일부는 목관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안치한 토광묘도 존재하였다.
[규모와 부장품]
조선 시대 무덤의 규모는 현재의 무덤과 크게 차이가 없다. 무덤의 내부에는 반상기(飯床器)[밥상에 사용하는 그릇류]를 부장하기도 하였다. 부장품으로는 반상기로 사용된 자기류와 함께 청동제의 그릇과 수저 등과 함께 장신구류와 동전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무덤은 고대나 고려 시대와 달리 부장품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유교의 선비 정신에 입각하여 검소하게 치러진 매장 의례에 입각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