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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92
한자 三韓時代-
영어의미역 Tombs of the Three Han States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이주헌

[정의]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묘제.

[개설]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무덤은 널무덤과 덧널무덤, 독무덤이 있었다. 부산 지역의 삼한 시대 유적은 매우 빈약하며, 부산광역시 영도구 조도 조개더미 1구 최하층 출토 점토대 토기와 동래구 복천동 내성 유적(萊城遺蹟) 1·2호 주거지, 온천동 민무늬 토기 출토 유적, 금정구 구서동 와질 토기 출토 유적 정도가 알려져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 의하면 부산에는 동래 지방을 중심으로 독로국(瀆盧國)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곳 주민들의 묘제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유적(久瑞洞遺蹟)에서 수습된 토기 유물로 보아 널무덤과 덧널무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널무덤]

부산 지역의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이 시기 지배 집단의 분묘 유적은 대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삼한 시대 초기 후반~후기 전반의 널무덤은 특정 구역의 전면에 거의 평지에 조영되는 반면, 후기 후반의 덧널무덤이 등장한 후에는 묘역이 구릉으로 옮겨져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부산 근교의 김해 대성동과 창원 다호리,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도 나타난다. 이 점을 중시한다면 비록 이곳은 조선 시대 동래 읍성의 중심부로서 이미 조선 시대 시가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형성에 의해 극심하게 파괴되었을 것이지만,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 자리한 중심 세력의 묘역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의 아래쪽 평탄 지역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널무덤은 먼저 서북 지역에서 기원전 3세기경에 나타났으며, 낙동강 유역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 초기인 기원전 2세기에 등장하여 2세기 중반까지 유행하다가 덧널무덤으로 발전되었다. 독무덤은 다른 무덤의 부속적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 뚜렷한 특성은 알 수 없다. 널무덤은 대체로 평지나 낮은 구릉에 무리를 이루며 조성되지만 단독으로 발견되기도 한다. 공동묘지 내의 널무덤은 부장품의 질과 양에서는 큰 편차가 없으므로 공동체적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였고 사회 분화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국읍에는 비록 주수가 있으나 읍락에 잡거하며 능히 제어하지 못한다[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라는 기사를 고려해 볼 때, 지배층과 일반 대중의 정치적인 엄격한 지배·피지배 관계가 명백히 성립되지 않은 상태임을 무덤은 말해 준다. 변진 제국 중 교역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국(國)은 존재하였지만, 이를 전체적으로 통괄하는 맹주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덧널무덤]

덧널무덤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주로 삼한 시대 후기인 2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삼국 시대 전기인 4세기 후반 무렵까지 성행한 무덤 형식이다. 덧널무덤의 규모와 피장자의 성격에 따라 대형 분묘만 주로 조영되는 수장 묘역, 중소형 분묘가 혼재되어 있는 묘역, 소형 분묘만 조영되는 묘역으로 구분된다.

유물의 부장 양상은 사방 공간을 부장 공간으로 이용하는 형에서 ‘ㄴ자상’이나 ‘ㄷ자상’으로 유물을 부장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유물의 종류는 화로 모양 토기[노형 토기(爐形土器)],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 굽다리 입 큰 항아리[대부광구호(臺附廣口壺)] 등이 있다. 또한 덧널무덤 단계에서는 무기의 증가 현상이 뚜렷하게 보이는데, 이는 유력자의 무덤에 고리 자루 큰 칼[環頭大刀]을 비롯하여 쇠화살촉, 쇠투겁창, 쇠낫 등의 부장량이 증가되는 현상으로 특정 집단이 내적인 질서 통제 수단이나 방어 수단 또는 소규모 전쟁에 사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시기 부산의 덧널무덤은 독로국 중심 집단의 무덤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주변 또는 주위에 영조되어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나, 시가지의 조성 등에 의해 현재는 거의 소멸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부산 지역에서 덧널무덤의 등장은 널무덤 단계보다 더욱 내적인 발전을 이룩한 독로국이 남해안과 낙동강의 유리한 지정학적 조건 등을 기반으로 교역의 중심지로서 변한 제국 중에서 더욱 중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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