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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52
한자 統一新羅時代-
영어의미역 Tomb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홍보식

[정의]

부산 지역에 있었던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

[개설]

지금까지 조사된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무덤으로는 덕천동 고분군, 노포동 작장 고분군, 부산 오륜대 고분, 반여동 고분군, 청강리 고분군, 교리 유적, 명례리 고분군, 기장 월드컵빌리지 조성 지역의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이 있다. 덕천동 고분군청강리 고분군은 6세기의 삼국 시대부터 조영된 고분군으로서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은 2~3기에 불과하고, 그것도 통일 신라 초에 해당하고, 통일 신라 후기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외의 지역에서 조사된 통일 신라 시대의 묘제는 교리 유적에서 발견된 돌방 1기만 굴식 돌방이고, 나머지는 모두 앞트기식 돌방이다. 대부분 많이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고, 바닥과 벽석 일부만 남아 있다. 돌방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이 있는데, 부산 오륜대 고분반여동 고분군에서 확인된 앞트기식 돌방은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고, 이외의 돌방은 평면 형태가 방형이다. 통일 신라 시대 돌방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 빠르고 방형이 늦은데, 장방형에서 방형으로 변화하는 시기는 대체로 7세기 중엽경이다.

[구조와 장법]

부산 지역에서 확인된 통일 신라 시대 무덤은 2~3기만 조영되었고, 무덤의 구조는 돌방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 앞트기식 돌방이다. 무덤은 대부분 구릉의 경사면에 분포하는데, 높은 쪽은 ‘ㄴ’자 모양으로 지면을 파고, 돌을 사용하여 돌방을 만들었다. 돌방의 규모는 개체마다 다양하지만, 대개 길이 250㎝, 너비 200~230㎝ 내외이고, 큰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돌방은 벽면 아래에 길쭉하거나 큰 얇은 돌을 세우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만들었고, 위로 가면서 벽을 안쪽으로 기울게 한 후, 1~2매의 뚜껑돌을 얹었다. 돌방 내부의 한쪽에 주먹 크기만한 돌을 한두 겹 깔아 시상을 만들고, 그 위에 관을 사용하지 않고 주검을 안치하였다. 주검의 머리 또는 발치에 토기와 쇠손칼 등 간단한 유물을 여러 점 부장하였다.

돌방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사례가 없어 정확한 구조 및 높이를 알 수 없지만, 돌방에 출입하는 입구를 경사가 낮은 쪽[대부분 남쪽]의 벽면 일부에 만들었고, 무덤에 1~2회 추가 매장을 하였다. 무덤에 인골이 남아 있지 않아 무덤에 묻힌 사람의 성별·나이·사망 원인·혈연관계 등을 확인할 수 없었다. 최근 유전학의 인골 DNA 분석 성과에 따르면, 같은 돌방에 매장된 피장자는 부부·자매·가족 등 다양하다고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도 부계 또는 모계를 따르는 쌍계제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돌방에 묻힌 사람의 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

불교를 수용한 이후 새로운 장법(葬法)의 하나로 시행된 화장은 불교적 생사관에 입각하여 장례가 간소화되면서 전통적인 매장 관념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 신라의 화장묘는 뼈를 안치한 용기의 구성에 따라 이중형과 단일형으로 구분된다. 연산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화장묘는 몸통이 편구형이고, 좁고 긴 목이 있는 병 위에 보주형 꼭지가 붙은 뚜껑으로 이루어졌다. 뚜껑과 몸통 표면에는 찍은 말발굽 모양 무늬가 장식되었는데, 이는 8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무덤이다.

[특징]

지금까지 조사된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무덤은 대부분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조영되었고, 8세기 후반 이후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부산 지역에 통일 신라 시대 무덤이 많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부산 지역만의 특징이라기보다 각 지방의 보편적인 양상이다. 9세기 이후가 되면, 수도인 경주에는 굴식 돌방무덤과 화장묘가 계속 조영되었지만, 지방에는 앞트기식 돌방무덤와 굴식 돌방무덤이 현저하게 사라지고, 구덩식 돌덧널무덤 또는 널무덤이 조영되었다. 이것들은 통일 신라 시대의 부산 지역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무덤군의 수와 무덤 수는 삼국 시대와 비교하면 현저하게 적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와서 무덤의 수가 줄어든 것은 통일 신라 시대에 부산 지역이 변방으로 전락하면서 큰 집단이 형성되지 않았고, 또 화장에 따른 산골(散骨)이 행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확인된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묘제는 대부분 앞트기식 돌방이다. 앞트기식 돌방은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마련하고, 하나의 석실에 여러 명을 매장하는 묘제로서 6세기부터 신라 지역에 유행하였다. 앞트기식 돌방은 여러 명을 매장할 수 있지만, 부산 지역에서 확인된 앞트기식 돌방에는 매장이 한 차례 이루어졌거나 또는 1회의 추가 매장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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