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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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己巳約條 |
영어의미역 | Gisayakjo|Gisa Agree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조약과 회담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승민 |
[정의]
1809년에 있었던 조선·일본 양국 교역 업무의 개정 약조.
[개설]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교역은 1609년(광해군 1) 기유 약조(己酉約條)가 체결되면서 재개되고, 1630년대 겸대제(兼帶制) 실시로 통교 무역에 관한 틀이 개편·재정비되면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역과 왜관 수리 등의 여러 측면에서 폐해가 발생하면서 조선의 경제적인 부담은 증가하였다. 조선은 재정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외교상의 관례를 중시하고 있었지만, 1811년(순조 11) 대마도 역지통신(易地通信)이라는 기회를 맞으면서 그동안의 통교 업무상의 폐해와 구체제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09년 대마도 당국과의 직접 교섭을 거쳐 기사 약조(己巳約條)가 체결될 수 있었다.
[체결 경위]
1787년(정조 11) 11대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 쇼군[將軍] 즉위 후, 막부에서는 대마도를 통해 여러 차례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연기하면서 기존의 에도[江戶]가 아닌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겠다는 서계(書契)를 보내왔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1811년(순조 11) 통신사를 대마도에 파견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선에서는 파견 장소를 바꾸는 것이 대마도의 독자적 결정이 아닌 쇼군의 명령 인가를 확인하고 통신사 파견에 관한 사항들을 협의하기 위하여 현의순(玄義旬)·최석(崔惜)을 당상관으로 하는 문위행(問慰行)을 1809년에 대마도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기유 약조(己酉約條) 체결 이래 누적되고 있던 외교·무역상의 폐해 개선을 대마도 측에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문위행 출발을 앞두고 당시 좌의정(左議政)이었던 김재찬(金載瓚)은 대일 통교상의 폐해 개선을 촉구하며 이른바 「폐해 16조(弊害16條)」를 상소하였고 이것이 비변사(備邊司)에서의 논의를 거친 후, 문위행이 도해(渡海)하여 대마도 당국과 직접 협의를 거치면서 기사 약조가 체결된 것이다.
[조약/회담 내용]
1809년 7월 5일 대마도에 도착한 문위행 일행은 대마도 역지통신을 위한 교섭을 시작, 7월 11일 다례(茶禮) 때 조선 조정의 특별 지시에 따른 성폐(省弊) 조건을 담은 각서를 대마도 측에 제시하였다. 이것은 통신사 의례를 대마도에서 거행하고 외교 의례상 조선이 일본 측에 양보한 것이 많으므로, 그 대신 이제까지 대일 통교상에서의 적폐(積弊) 개선을 요구한 것이었다. 각서는 김재찬의 「폐해 16조」를 기본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총 7개조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중절오선은 영원히 혁파한다[中絶五船, 永罷]는 것이다. 중절오선은 수직왜(受職倭) 5인이 죽은 후 대마도주의 간청에 의해 지속된 것으로, 기유 약조에도 규정되지 않은 무역선이었다. 그런데 중절오선의 도해 자체가 기유 약조에 어긋나는 것이고 진상·공무역가로 공목(公木)이 지급되는 것은 의미가 없으므로 이를 중지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 고환 차왜의 파견을 제한한다[告還差倭, 只以書契歲遣船便順付, 而太守承襲後初次還島, 則只送一番差价]는 것이다. 고환 차왜는 대마도주가 3년에 한 번 에도 참근[江戶參謹]을 마치고 돌아온 사실을 알리는 차왜이다. 그런데 이것이 형식적인 것으로 큰 의미가 없고 차왜를 접대하는데 불필요한 경비가 소요되므로, 앞으로는 대마도주의 환도 사실을 세견선(歲遣船) 편에 서계로 붙여 보내고 고환 차왜 파견은 새 대마도주 즉위 후 첫 번째 환도로만 한정하였다.
셋째, 공작미의 교환 비율을 변경한다[公木一匹, 以公作米十斗磨鍊]는 것이다. 원래 대일 공무역품의 대가로 공목을 지급하였는데, 1651년(효종 2)부터는 공목의 품질 저하와 대마도의 요청으로 인해 공목 400동(同)을 1필당 쌀 12말의 비율로 5년 기한으로 지급하고 이것을 공작미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환산 비율은 공작미를 직접 마련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을 가져왔으며, 대마도에서는 기한이 다할 때마다 공작미 연한 재판(公作米年限裁判)을 파견하여 기한을 연장하였고, 조선에서는 재판 차왜에 대한 접대에 많은 비용을 소모하였다. 이에 공작미 환산 비율을 공목 1필당 쌀 10말로 줄여 조선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넷째 감동 연한을 한정하고[監董年限, 以四十年爲限], 다섯째 감동 물력을 양국이 나누어 마련하고[監董物力, 以分數磨鍊], 여섯째 왜관 서문 쪽에 담을 쌓고 문을 설치한다[和館西方, 築垣設門]는 것이다. 감동은 국가가 공사를 감독하는 것으로, 25년 사이에 왜관의 동·서관을 수리하는 것이 대감동이고, 불에 탄 곳을 다시 짓거나 혹은 다시 지은 후에라도 일정 햇수가 지나면 수리하는 것이 소감동이다.
위 사항들은 모두 왜관 개수와 관련이 있다. 우선 대감동(大監董)의 연한을 종래 25년이던 것을 40년으로 연장하였다. 그리고 왜관 수리에 소요되는 경비를 조선에서 과도하게 부담하고 있으므로, 이를 조선과 대마도가 일정액의 경비와 공사 기간을 사전에 정해두고 대마도 측에서 전체 공정을 인수하여 조선이 비용을 허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관 서쪽에 담을 쌓고 문을 설치하여 왜관 내 일본인의 외부 왕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곱째, 표착 선박에 대한 급료 지급 방식을 변경한다[左右沿漂船給料, 以枰木施行]는 것이다. 조선에 표착한 대마도 선박에게는 18세기 중엽 이후 잡물을 지급하였는데,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두승(斗升)의 크기가 통일되지 않아서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호조(戶曹)에서 교정한 곡자(斛子)를 가져가 쓰고 평목은 동래부(東萊府)에서 보내는 것으로 사용하게 하여 필요 이상의 부담을 줄이고 폐단을 없애고자 한 것이었다.
대마도는 이러한 조선 측의 요구 사항에 대하여 무역액의 축소라는 측면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마도로서는 역지통신을 실현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막부를 상대로 교섭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또한 막부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재정 원조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면서 약조 체결에 동의하였다. 이후 문위행 일행은 연례 송사(年例送使)의 별폭(別幅) 및 공무역량의 감소, 단삼(單參) 점퇴 금지, 각 연향(宴享)에 정관(正官) 참석, 왜관 관수(館守) 이하 관리들에 대한 시탄(柴炭) 지급 규정, 잠화(潛貨) 및 노부세(路浮稅) 엄금, 왜관 난출(闌出) 금지, 공목 점퇴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추가 조건을 대마도 측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대마도는 이러한 요구 조건들을 받아들일 경우 왜관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을 고려하여 정관의 연향 참석 이외에는 응하지 않았다.
[결과]
대마도는 조선에서 제시한 7개조 사항 중 제5조에 대해서는 미리 약정(約定)하기 곤란하므로 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교섭을 진행하기로 하는 단서 조항을 마련하여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리고 통신사를 맞이하느라 많은 비용이 지출되어 당장 약조를 시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약조의 본격적인 시행은 1811년(순조 11) 통신사행의 도해가 끝난 이후로 하기로 하였다. 이후 양국 통교상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우선 중절오선이 혁파되고 무역 또한 중지되면서, 조선은 이들에 대한 진상 및 공무역가인 공목 지급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공작미 환산 비율이 공목 1필당 쌀 12말에서 10말로 줄어들면서 기존의 총지급량 1만 6000석에서 2,666석이 줄어든 1만 3333석 5두를 대마도에 지급하게 되었다. 즉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조항들에 대해서는 그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우선 약조 체결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직접 고환 차왜가 파견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왜관 수리 관련 조항들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기한이 40년으로 늘어난 대감동보다 특별한 규제가 없는 소감동이 중점적으로 행해졌고, 수리 기간과 비용을 사전에 정하여 대마도에서 전체 공정을 인수하는 방식 역시 1815년(순조 15)과 1826년(순조 26) 두 차례만 도입되었을 뿐 그 이후에는 전적으로 조선 측의 부담으로 이루어졌다. 왜관 서쪽에 담을 쌓고 문을 설치하는 것 역시 행해지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기사 약조는 대일 통교상 여러 방면에 걸쳐 누적되어 온 적폐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체결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조선은 양국 통교 무역을 재정비하고 양국 관계의 매개자 역할을 해 온 대마도에게 베풀어주었던 외교·경제적 우대 조치를 삭감하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양국 통교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사 약조의 체결로 인하여 그동안의 폐해가 일시에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교상의 관례를 중시하던 조선이 무역 부담을 스스로 감소시키고자 하였다는 점과, 기유 약조 체결 이래 변경 없이 지속되어 온 대일 통교 업무가 상당 부분 수정되어 19세기 조일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