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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44
한자 加德鎭
영어의미역 Gadeokjin Military Ba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에 왜구 방어를 위해 설치한 수군첨절제사영.

[제정 경위 및 목적]

가덕진(加德鎭)은 조선 시대 가덕도에 왜구 방어를 위해 설치한 수군첨절제사영이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 왜변이 일어나자, 진관 체제(鎭管體制)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천성보(天城堡)와 가배량성(加背梁城)을 시설하고, 옥포의 지세포·조라포·안골포를 가덕 진관에 속하게 하였다.

[관련 기록]

『국조보감(國朝寶鑑)』 제20권 중종조 30년 기사에는 “2월에 웅천에 가덕진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중종실록(中宗實錄)』 39년 갑진조에는 “가덕진을 설치하기 위해 좌찬성 이기(李芑)를 순변사(巡邊使)로 보내 진을 설치하는 형편 및 군량·군기(軍器) 등의 일을 감사 및 병사·수사와 함께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종실록』 39년 갑진조에는 “가덕도는 진보(鎭堡)의 성터를 살펴 감독하여 쌓되, 전폐(全廢)한 진의 군사와 방어가 수월한 곳의 군사를 뽑아 옮겨 채워 주며, 가덕진에는 노비를 정하여 주도록 조처하였다”라고 하였다.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6년 을사조에는 “결성현(結城縣) 사람 박승원(朴承元) 등 16명이 배를 타고 장사하러 가다 가덕진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대마도에 표류 정박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순조실록(純祖實錄)』 4년 갑자조에는 “김우광을 웅천현 가덕진에 정배하였다”라고 하였다.

[내용]

가덕 진관에는 첨사로 종3품 무인이 책임자이었으며, 이하 여러 군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병선 2척, 사후선(伺候船) 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변천]

1544년 사량진 왜변 이후 경상 우도의 해안 방어를 위해 기존의 제포 진관을 폐지하고 가덕 진관과 미조항 진관으로 확대 설치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함락되고 난 후 안골포진성으로 옮겼다. 1656년(효종 7) 삼도 수군통제사 유혁연(柳爀然)의 요청으로 정비하여 다시 가덕도로 복귀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가덕 진관을 혁파하였다.

[의의와 평가]

가덕진은 사량진 왜변 이후 경상 우도의 해안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된 진관이다. 남해의 미조항 진관과 함께 경상 우수영의 중요 요충이었음을 알 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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