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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33
한자 倭里
영어의미역 Japanese Village
이칭/별칭 왜락(倭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승민

[정의]

조선 전기에 삼포, 특히 부산포에서 항거 왜인이 거주한 마을.

[개설]

고려 말부터 극심한 피해를 입혔던 왜구는 조선 건국 이후 적극적인 왜구 금압책이 효과를 거두면서, 점차 사송 왜인·흥리 왜인·향화 왜인 등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고 특별한 규제가 없는 상태에서 수천 명의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와 여러 곳에서 무질서하게 머무는 상황이 되자, 조선에서는 이들을 한 곳에 모아 통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부산포·제포[내이포]·염포의 삼포(三浦) 왜관이고, 왜관에는 사송 왜인·흥리 왜인 등이 외교와 교역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항하여 머물고 있었다.

왜관과 아울러 항거 왜인(恒居倭人)처럼 조선에 정착해 사는 일본인 마을도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왜리(倭里) 혹은 왜락(倭落)이라고 불렀다. 즉 일본 사절이 머무는 객관(客館), 양국 상인이 교역하는 상관(商館), 포구의 일본인을 총괄하는 우두머리가 근무하는 공관(公館)을 아우르는 왜관과 함께, 항거 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인 왜리가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 전기의 왜리는 왜관과 따로 형성된 이원적 공간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왜관과 왜리가 분리되지 않은 일원적 공간으로 존재하였다.

[왜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현황]

세종(世宗) 초기에는 삼포에 거주할 수 있는 일본인의 호수(戶數)를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 등 총 60호로 약정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는 꾸준히 늘어나서, 1466년(세조 12) 제포 300호 1,200여 명, 부산포 110호 330여 명, 염포 36호 120여 명이던 것이, 1494년(성종 25)에 이르면 제포 347호 2,500명, 부산포 127호 453명, 염포 51호 152명으로, 총 525호 3,105명 등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수치상으로 비교했을 때 부산포의 경우 당시 동래현 전체 호수의 1/3, 인구수의 1/8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꽤 많은 수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구 구성을 살펴보면 일반인 남녀노소와 함께 승려도 일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왜리에는 일본식 사찰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리의 모습과 생활]

부산포 왜관에 존재했던 왜리의 모습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등의 기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부산 아래가 부산포인데 그곳에 항거 왜호가 산다.”고 했는데, 그 위치는 현재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부근이라고 한다.

일본인이 사는 집을 왜가(倭家)·왜막(倭幕), 그리고 일본인이 모여 사는 마을을 왜리 혹은 왜락이라고 했는데, 자성대(子城臺) 옆 바닷가에 비늘처럼 집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왜리 주변에는 증산 아래 수군만호영청(水軍萬戶營廳)이 있었고, 조선인 마을과는 특별한 경계가 없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인들의 집 둘레에 목책과 바깥담을 설치하고 출입문을 만들어 출입을 감시하는 등 경계를 명확히 하고 제한 구역을 확실히 정하고자 하였다.

조선 정부의 경계 강화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인들은 자체적으로 목책을 세우고 방위 시설을 설비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땔감을 구하거나 예불을 하러 간다는 명목으로 왜리를 벗어나거나, 혹은 장사를 위해 변장하여 왜리 밖 조선인 마을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정부는 이를 엄금했으나, 별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왜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고기잡이를 하거나 거주 지역 내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특히 부산포 왜리의 일본인들은 조선인과의 교류를 통해 비교적 소규모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는데, 주로 부산진성 민가 아래에서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서로 부채를 주고받으며 밀무역을 하기도 했고, 교간(交奸)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편 왜리의 일본인들에게 동래 온천은 매우 인기가 있었는데, 부산포 뿐 아니라 제포와 염포의 일본인과 사신들도 즐겨 찾는 휴양지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고 이들의 신앙 문화가 전파되면서 부산포 왜리에는 견강사(見江寺)·게월암(憩月庵) 등의 일본식 사찰도 들어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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