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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 왜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796
한자 恒居倭人
영어의미역 Japanese People Living in Kore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문종

[정의]

조선 시대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 거류한 왜인.

[개설]

조선 초기 다양한 왜구 대책의 실시로 왜구의 침입은 감소한 반면에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도항하는 통교 왜인은 증가하였다. 그러나 통교 왜인의 증가에 따른 치안·경제상의 폐단이 발생하자 1407년(태종 7)에는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왜인들이 정박할 수 있는 포소를 부산포와 제포(薺浦)로 제한하였다. 그 후 왜인의 요구로 내이포와 가배량(加背梁)이 추가되었으나 1419년 대마도 정벌로 포소가 폐쇄되었다가 1426년(세종 8)에는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三浦)’가 개항되었다.

[변천]

삼포에는 각각 왜관이 설치되었으며, 왜인들도 거주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삼포에 거주하는 왜인이 계속해서 증가하자 1434년(세종 16)에 대마 도주에게 그들을 쇄환(刷還)해 가도록 요구하였다. 1436년에 대마 도주가 내이포 253명, 염포 96명, 부산포 29명의 항거 왜인을 쇄환해 갔는데, 이때에 조선에서는 도주가 요청한 60명보다 많은 206명을 삼포에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그런데 도주가 거주하기를 요청한 관하 60인(人)은 후에 60호(戶)의 의미로 바뀌어서 내이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로 배당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고, 삼포에 거주하는 항거 왜인의 수가 계속 증가하였다. 그 결과 항거 왜인의 수는 1466년(세조 12)에 446호 1,650명, 1474년(성종 5)에 411호 2,176명, 1475년에 430호 2,209명, 1494년(성종 25)에 525호 3,105명에 달하였다. 특히 삼포 중에서는 제포에 가장 많은 항거 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편 부산포에 거주하는 항거 왜인은 처음에 20호를 약정하였으나 1466년에는 110호에 330명, 1474년에는 88호 350명, 1475년에는 88호에 350명, 1494년에는 127호에 453명이었다.

이들은 삼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일본의 통교자를 대신해서 교역을 하고 때로는 밀무역을 중개하였으며, 주변의 땅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때때로 대마 도주에게 쇄환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조선 관원들과의 마찰이 잦아져, 1510년(중종 5)에는 항거 왜인이 중심이 되어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그 결과 삼포는 폐쇄되었다가 1512년 임신조약(壬申條約)으로 제포만 다시 개항하였지만 항거 왜인의 거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521년(중종 16) 부산포를 추가로 개항하였으나 사량진 왜변으로 다시 폐쇄되었다가 1547년에 부산포만 개항하여 임진왜란 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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