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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화 왜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994
한자 向化倭人
영어의미역 Naturalized Japanese
이칭/별칭 귀화 왜인(歸化倭人),투화 왜인(投化倭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문종

[정의]

고려 시대·조선 시대에 귀화한 왜인.

[개설]

고려 시대 향화 왜인(向化倭人)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999년(목종 2)에 일본국 사람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내투하자, 이들을 이천군(利川郡)에 살게 하고 편호(編戶)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향화 왜인은 많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1395년(태조 4) 1월에 왜인 표시라(表時羅) 등 4명이 투항해 온 이후부터 향화 왜인이 매우 증가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의 다양한 왜구 대책과 토지나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 초기의 향화 왜인은 왜구로서 투항한 자가 많았다. 이는 조선의 왜구 대책에 따라 왜구가 평화적인 통교자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향화 왜인에 대한 정책]

조선에서는 향화 왜인에게 토지와 식량, 가옥 등을 하사하고, 전조(田租)와 부역 등을 면제해주었으며, 일부에게는 조선의 관작을 제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향화 왜인은 계속 증가하여 1410년(태종 10)에는 경상도에 분치된 향화 왜인의 수가 무려 2,000여 명을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1444년(세종 26) 이후에는 일본에 거주하는 왜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하였기 때문에 조선에 투항한 향화 왜인이 급격하게 감소하였다. 이후 향화 왜인은 임진왜란기에 다시 나타났으나, 그 이후에는 그 모습을 감추었다.

조선에서는 처음에 향화 왜인을 경상도와 전라도의 연안에 분치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흥리 왜인(興利倭人)과 서로 왕래하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자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향화 왜인의 외방출입을 금지하고 사적인 왕래 및 통신을 금지하였다. 한편 대마도 정벌 이후 병조(兵曹)에서 구류 왜인이나 포로를 왜안(倭案)에 기록하여 관리하면서 쇄환(刷還) 시에 근거로도 활용하였다. 그 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 시기에 이르러서는 예조(禮曹)에서 향화 왜인을 향화안(向化案)에 기록하여 관리하고 병조에서 향화인에 대한 포폄(褒貶)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는 예조와 병조로 하여금 향화인을 이중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였다.

[의의]

조선 전기의 향화 왜인은 왜구의 토벌에 종군하였거나 조선에 침입하였던 적왜를 붙잡아 오는 일, 왜구 및 일본의 정세를 조선에 제공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하는 등 왜구의 침입을 사전에 방지 억제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절의 왕래 및 사행의 호송, 의술·조선술·제련술을 전수하는 등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향화 왜인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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