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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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場 |
영어음역 | Busan Marke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광석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일대에서 조선 시대에 열린 오일장.
[개설]
장시(場市)는 상인들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물화의 교역장이었다. 부산장(釜山場)에서 매매되는 물건은 주로 쌀·보리·콩 등 곡물이 중심이었고, 다음으로 무명·삼베·모시 등 직물을 포함한 수공업품 및 일상용품 등이었다.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부산포 왜관은 장이 서면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 부녀자들의 장사는 여러 문제로 왜관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부산장에 대해서는 제한하지 않고 남녀가 섞여 장사를 하였다.
장시의 발달은 국지적인 시장권 형성과 함께 전국적으로 지역 간 물화 유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부산장 외에 동래 읍내장, 좌수영장, 구포장, 독지장, 하단장 등이 있었다. 부산장은 하단장·구포장과 함께 낙동강 하구의 물화 유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었고, 또한 낙동강 수운을 통해 상주까지 연결되어 문경 새재를 넘어 남한강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세곡과 상품 수송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명칭 유래]
부산장은 동래부의 수군 진(鎭)인 부산진(釜山鎭) 관내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장이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부산장은 조선 시대 중엽부터 지방 장시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영조 때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등장하였다. 부산장은 수운이 유일한 대량 운송 수단이던 개항 이전까지 부산 상거래의 중심지이었다. 기장과 김해, 남해안 쪽에서 배가 오가고 내륙의 동래, 울산, 양산 등지에서도 오갔다.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자성대(子城臺) 북쪽에 있던 왜관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왜관 대청에서는 3일과 8일에 대상인들의 무역 거래가 있었고, 왜인들을 상대로 한 조시(朝市)도 매일 아침 열렸다.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본다”는 말은 어쩌면 당시 부산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구절일 것이다.
개항기 전후로 황하전이라 불리는 잡화상이 열려 박가분·댕기·거울·가위 등 새로운 상품이 성황리에 판매되었고, 그 외에 채소·과일·어물점 등도 한 몫 끼어 번창하였다. 또 중국 상품이 들어와 비단·직물 등이 출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의 거주지이던 부평동 시장이 번성하면서 상대적으로 쇠락하였다. 그래도 부산진 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현재 부산진 시장은 부산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부산장은 조선 후기 부산진성이 있던 지금의 자성대 앞쪽 지역으로, 오늘날 부산진 시장이 위치한 곳이다.
[관련 기록]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와 『동래부 사례(東萊府事例)』[1895]에 관련 기록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