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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569
한자 牧場
영어의미역 Official in Charge of Wo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전통 시대 부산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목장.

[삼국 시대]

국방상의 목적으로 군용의 말을 기르는 목장은 삼국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174개의 말 목장이 있었다. 관영 목장 뿐 아니라, 귀족·고관들의 사유 목장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래현 산천조에, “절영도는 동평현의 남쪽 8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라고 하고, 이어서 고려 태조(太祖)에게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바친 명마 이야기를 싣고 있다. 후삼국 시대 후백제의 판도가 부산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절영도 목장(絶影島牧場)은 명마를 산출하는 곳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절영도라는 섬 이름도 명마가 빨리 달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는 데서 연유하였다.

[고려 시대·조선 시대]

고려 중기에 들어오면 말 생산의 중요성은 더욱 커져 목마장의 건설이 점차 서남 도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 무렵 부산 지역의 목마장은 말을 공급하는 곳으로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다. 조선 초기부터 다시 국방상의 이유로 말의 사육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에 약 159개소의 관영 목장이 운영되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따르면 동래현 남쪽에 석포 목장(石浦牧場), 절영도 목장 및 오해야 목장(吾海也牧場)이 있었으며, 석포 목장에는 목마 232필, 절영도[영도] 목장에는 목우 276두, 오해야 목장에는 목마 793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래부에는 섬인 절영도와, 내륙 분지인 오해야항, 연안인 석포에 목장이 분포하였다. 특히 절영도는 오래전부터 명마 산출 지역으로 알려진 만큼,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목장지로 운영되었다.

17세기 목장의 내용을 상세히 그린 『목장 지도』[1678]에서, 석포 목장의 경우 돌출된 반도에, 절영도 목장은 섬에, 오해야항 목장은 분지형의 산지에 그려서 입지 특성을 보여 주었다. 석포오해야항의 경우 담장과 출입구를 그렸으며, 오해야항에서는 외성, 중성, 내성의 표시를 하였다. 이들 경계는 목책이나 석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부의 절영도 목장의 경우 141필[부산대학교 소장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64필]의 말이 사육되었다. 조선 후기 절영도 목장은 동래부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동서 13리, 남북 7리, 둘레 40리의 크기에, 73명의 목자(牧者)가 속해 있었다. 한편 동래부의 석포 목장과 오해야항 목장은 조선 후기에 폐지되었고 대신 사복시(司僕寺)의 둔전(屯田)이 설치되었다.

목장은 대부분 육지와 가까운 섬이나 반도와 같은 목축이 편리한 국유지에 입지하였다. 조선 후기 인구가 증대하고 농경지가 부족해짐에 따라 둔전의 개간과 같은 농경지 확대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 국마(國馬) 목장이 축소되는 일이 많았다. 이 같은 조건에서 동래부의 석포 목장과 오해야항 목장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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