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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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山道 |
영어의미역 | Hwangsand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한정훈 |
[정의]
조선 시대 황산역을 중심으로 김해·동래·울주·밀양 등지의 인근 고을을 잇는 역로.
[제정 경위 및 목적]
황산도(黃山道)는 조선 전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설치된 역로이다. 그 가운데 황산도 동로(東路)는 양산군 황산역(黃山驛)[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690번지 서부 포교당 아래 일원]에서 부산으로 연결되는 역로이다. 이 길은 유산역(由山驛)[양산시 유산리 구터]~소산역(蘇山驛)[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 마을]~휴산역(休山驛)[동래구 수안동 부산동래경찰서 자리]을 통해 동래 도호부에 이른다. 또한 기장군의 아월역(阿月驛)[정관읍 월평리]을 통해 양산은 물론 북쪽의 간곡역(肝谷驛)~굴화역(屈火驛)을 통해 울산에 이른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 서문에 “황산도 승이 관할하는 역은 13개소 잉보·노곡·구어·부평·굴화·간곡·윤산·위천·덕천·아월·성산·기장신역·동래신역이다[黃山道丞所管驛十三 仍甫, 奴谷, 仇於, 富平, 屈火, 肝谷, 輪山, 渭川, 德川, 阿月, 省山, 機張新驛, 東萊新驛]”라고 기록되어 있고,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1 역체 각도 속역에 “황산도에 속한 역은 16개소로 유산·위천·덕천·잉보·노곡·굴화·간곡·아월·신명·소산·휴산·수안·용가·덕산·무흘·금동[黃山道屬驛十六 由山, 渭川, 德泉, 仍甫, 蘆谷, 掘火, 肝谷, 阿月, 新明, 蘇山, 休山, 水安, 龍駕, 德山, 無屹, 金洞]”이라고 적혀 있다.
[내용]
황산도의 역로 중 부산 지역의 옛길을 따라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출발지인 휴산역에서 동래 읍성 밖 남문·서문·암문을 거쳐 명륜초등학교 운동장을 지나 마안산을 따라 온천장 교차로에 다다른다. 동래 읍성 암문에서 온천장 교차로까지 가는 길을 ‘대낫들이길’이라 불렀다.
온천장 교차로에서 명륜로로 직진하면 공수 물소 공원[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2동]에 다다른다. 공수 물소 공원에서 오륜대길로 가면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3동 일대 기찰 마을이 나온다. 부곡새마을금고[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3동 60-16번지] 자리에 있던 기찰 양조장 앞의 거대한 정자나무인 무학송(舞鶴松)[수령 800년]이 기찰 마을의 수호목이었다. 또한 금정농협 기찰지점 자리에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이 있었다. 이곳은 일종의 검문소로 기찰포교(譏察捕校)를 주재시켜 왕래하는 통행자의 증명서를 조사하여 외국 첩자나 수상한 사람을 검문하는 한편 상인들의 물품을 검사하였다.
이곳에서 동래여자고등학교 앞 체육공원로를 따라 가면 소산역에 이르게 된다. 태광산업 일대 들판을 역들이라고 하는데, 이 역들은 소산역의 자체 경비 조달을 위해 지급된 역전(驛田)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도로로 가다가 브니엘국제예술중학교·브니엘고등학교를 지나면 소산 고개를 만나게 된다. 소산 고개는 임진왜란 때 소산역을 지키기 위해 제일선에 진을 치고 방어한 소산 전투의 현장이다. 이 방어선이 무너지자 김정서(金廷瑞)[상현 마을 출신]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다.
소산 고개를 넘어 좌회전하여 경부 고속 국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 마을이다. 하정길로 가다가 우회전하면 소산역이 있던 경로당이 나온다. 여기서 200m쯤 떨어진 하정길 개천 건너편에 마방(馬房) 터가 있고 여기서 마당제(馬堂祭)를 지냈다.
황산 찰방 조석목(趙錫穆)[재임 1780~1781]의 『정사 문집(精舍文集)』에 황산역의 폐정 개혁을 논한 내용 중 “휴산역과 소산역은 변방 관문에 위치하고 거주하는 호수가 몇 집만 남아 있으므로 매우 영세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역에서 수납하는 세금을 다른 역보다 삭감해 주었다고 한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 마을 어귀 하정2길[비석길]은 현재 남아 있는 황산도로 도로 폭은 5m이다. 이 길에 이만직 영세불망비(李萬稙永世不忘碑)와 황산 이방 최연수 애휼역졸비(黃山吏房崔延壽愛恤驛卒碑)가 있다. 첫 번째 비석에는 1878년(고종 15) 암행어사 이만직(李萬稙)이 영세한 소산역에 세금을 면세해 준 은혜를 잊지 못해 송덕시를 적어 놓았다. 그리고 두 번째 비석은 휴산역·소산역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이방 최연수(崔延壽)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79년(숙종 5)에 세웠다.
하정2길에서 다시 체육공원로로 가서 부산 영락 공원·금정도서관길을 만나게 된다. 갈록산 기슭 왼쪽 길섶에 선정 마애비인 조재민 선정 만고불망 마애비(趙載敏善政萬古不忘磨崖碑)와 그 위의 솟은 바위에 있는 동래 부사 정이검 청덕선정만고불망비가 황산도의 이정표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 대방산길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직진하는 노포동 고분길이 황산도 옛길이다. 고분길로 따라가면 금정로와 만나는 팔송 경찰 초소가 있다. 여기서 왼편 노포로가 지방도 1077호선인데, 일제 강점기 때 황산도를 덮어 신작로를 만든 도로이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작장 마을·대룡 마을을 거쳐 녹동 마을에 이르는데 이 마을을 지나면 부산과 양산 경계 지점인 지경 고개[사배야현]이다. 지경 고개 마루에도 경거 가선대부 양공유하 이혜불망비가 남아 황산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변천]
황산도에서 관할한 역은 12개소에서 17개소로 많아졌다. 세조 때 황산역 찰방이 관리한 역이 11개소이었지만, 조선 후기 『영남 역지(嶺南驛誌)』와 『만기요람』에서는 황산역을 포함하여 총 17개 역을 관할한 것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황산역이 찰방역(察訪驛)으로서의 기능이 더 커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황산도 역로 중 양산~부산의 옛길은 영남 대로(嶺南大路)의 끝자락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물건 팔러 가는 보부상, 조선 통신사 행렬, 왜군과 싸우던 군사 등이 지나치던 역사의 생생한 현장이다. 이런 역사·문화적인 측면을 감안하면 세밀한 연구를 통한 옛길 복원 사업이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