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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29
한자 左水營城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in Jwasuyeong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현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과 더불어 발생
발생|시작 장소 수영성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일대
종결 장소 수영성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일대

[정의]

임진왜란 중 부산의 좌수영성 일원에서 전개된 이 지역 의병들의 유격전.

[개설]

경상 좌수영의 본영인 수영성을 중심으로 7년간에 걸쳐 지역민들이 앞장서서 지속적으로 싸운 전투로,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에 남은 민초의 삶이 생생하게 담긴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의 개전 초기, 부산 지역의 대표적 전투인 동래성과 부산진성 전투가 관민의 합심으로 이뤄진 항쟁으로 역사 기록 속에 남은 데 비하여, 당시의 수군 주요 지휘관이었던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이 일찍 응전을 포기하고 달아남으로써 수영성 일대는 저들의 일방적인 승전 터가 되고 말았다. 이에 이 지역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싸우게 된 것이다.

[경과]

수영성이 함락되고 왜군의 수중에 들어간 뒤임에도 자발적으로 수영 출신 수군과 성민 25명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하고, 장수가 퇴진한 것을 분개하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비분강개하여 종군하고 싸웠다. 7년간 수륙 양면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싸우다가 순절하였으나, 한동안 그들의 행적이 가려진 채 드러나지 않았다.

[결과]

주장(主將)이 없는 상황에서 이름 없는 군민(軍民)들이 궐기하여 이룬 전과였으므로, 그 충절과 의기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609년 동래 부사 이안눌(李安訥)이 부임한 후, 지방민의 청원을 받아 그들의 행적을 되살려 『정방록(旌榜錄)』이란 책자에 싣고 그 집 대문마다 ‘의용(義勇)’이란 팻말을 걸게 하였다. 그 후 1806년 부임한 오한원(吳翰源) 부사는 그 후손들에게 부역을 면제하고, 글을 지어 포상하고 그들의 순절을 기렸다. 1853년 4월 당시의 경상 좌수사 장인식(張寅植)이 1849년 12월부터 이듬해까지 좌수사를 역임했던 이형하의 글씨로 저간의 사적을 소상하게 밝힌 비를 세우고, 25의용단을 쌓고 재실인 의용당을 지어 봄, 가을 두 차례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의 관군과 의병의 전공(戰功)은 대개 역사 기록 속에 전해지고 있으나, 좌수영성 전투는 군민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선(戰線)에서 이탈한 좌수사의 과실이 두드러져서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끝내 국가 차원의 포상은 이뤄지지 못한 채 지방관의 시혜 조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토 수호를 위한 지역민의 의기와 항전은 역사 속에 오롯이 살아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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