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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요양 문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07
한자 朝鮮時代-療養文化
영어의미역 Convalescence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온천을 중심으로 한 요양 시설의 운영·이용과 관련된 문화.

[개설]

조선 시대의 요양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은 온천 시설인데, 동래 온천은 특히 효능이 있는 우수한 온천으로 알려져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동래현(東萊縣)에서 온천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며, 그 뒤 점차 이용자가 많아지면서 시설이 확충되었다.

[온천 시설과 이용]

조선 시대의 요양 문화를 대표할 만한 것은 온천의 이용이다. 온천의 건강 요법과 치병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온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특히 동래 온천은 각종 병을 고치는 효험이 뛰어나 수많은 서울의 고위 관료, 양반 명사들의 내방이 끊이지 않았다. 동래 온천의 명성은 일본까지 알려져서, 우리나라를 찾아온 왜인(倭人)들의 방문 희망지에 포함될 정도였다.

조정에서도 늘어나는 온천의 수요를 적절하게 감당하고 온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온천의 이용을 제도화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부터 온천은 보건 행정상 매우 중요시 되었다. 그 때문에 관청에서 편찬한 『지지(地誌)』에 반드시 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484년(성종 15)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비롯하여, 1746년(영조 22) 편찬한 『속대전(續大典)』 등 각종 법전에도 온천의 운용을 명기하였다. 온천이 있는 군현의 수령(守令)은 온천에 시설을 갖추고 운영과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같은 배경 아래, 조선 초기 동래현에서도 온천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또한 역마(驛馬)를 배치하여 각지에서 모여드는 욕객들의 교통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온정(溫井) 부근에는 관립 여관인 ‘온정원(溫井院)’을 세워 욕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점차 욕객의 수가 늘어나 지나치게 번잡해지자 온정원만덕 고개 가까이 있는 화미리(華美里)로 옮기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온정(溫井)은 현(縣)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을 정도이고,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곧 낫는다.”고 기록하였다. 이미 신라 때부터 국왕이 직접 동래 온천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시대 들어 동래 온천은 전국 각지에 산재한 온천 중에서도 우수한 온천으로 명성이 나 있었다. 성종(成宗) 때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동래 온천을 전국의 온천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고 지적하였다. 실학자인 이수광(李睟光)은 1614년에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황해도 평산·연안과 충청도의 온양, 강원도의 이천·고성과 경상도의 동래 온천을 가장 좋은 온천으로 꼽았다.

선조(宣租)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석학으로 이름난 정구(鄭逑)가 남긴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은 1617년(광해군 9) 그의 나이 75세 때에 고향 성주(星州)에서 동래 온천으로 찾아가 요양하고 돌아가기까지의 45일 동안에 있었던 일을 일기체로 자상하게 기록한 기행문이다. 이 책은 당시 그를 모시고 따라온 제자들이 엮은 것으로 그때의 동래 온천의 시설 등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봉산욕행록』에 따르면, 정구는 의사의 약물 치료와 함께 온천 요법을 행하였다. 30일간 목욕을 한 정구는 처음에는 시탕(試場), 곧 물을 떠내어 가볍게 몸을 씻는 단계에서, 다음은 나무로 만든 욕조를 거치고, 다시 욕조 바깥에 물을 받아두는 곳인 외석정(外石井)을 거쳐, 마지막으로 욕조에 들어가는 순서를 밟았다. 목욕 횟수도 처음에는 이틀 걸러 한번, 다음은 하루걸러 한 번씩 하다가 매일 하는 방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하루 동안에도 처음에는 1회, 다음은 2회, 끝날 무렵의 일주일은 매일 3회씩 하는 과정을 따랐다. 정구가 한 달 간의 목욕을 끝내자 안색과 기혈이 전보다 훨씬 좋아져, 보는 이들마다 모두 동래 온천의 효험이라 놀라워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변천]

온정 개건비(溫井改建碑)에 의하면, 동래부(東萊府)에서는 1691년(숙종 17)에 건물을 짓고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고 지붕을 덮었는데, 그 후 건물이 낡아 탕이 막히게 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는 재임 중이던 1766년(영조 42) 새로운 온천을 파서 2개의 목욕탕을 만들고 낡은 건물을 개축하였다. 이때 지은 목욕탕은 남탕과 여탕을 구획한 9칸짜리 건물이었다. 비문을 쓴 송광적(宋光迪)의 표현에 따르면, “그 모습이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온정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1851년(철종 2)에는 목조(木槽)를 다시 석조(石槽)로 바꾸었다. 1878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전용 목욕탕이 생겼으며 1898년(고종 35)에는 일본인 위탁의 여관이 생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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