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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45
한자 多大浦鎭
영어의미역 Dadaepojin Military Ba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시대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포에 설치된 수군첨절제사의 진영.

[제정 경위 및 목적]

다대포진(多大浦鎭)은 임진왜란 전 원래 부산 진관에 속해 있던 다대포 만호영이 목도[현 영도]에서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첨사영(僉使營)으로 승격된 것이다.

[관련 기록]

『경상도 속찬 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보면, 다대포는 부산 진관으로 편제될 때 다대포 만호영이었으며, 무관 종4품이 수장이었다. 이때 영은 장림에 있었다. 이 영이 다대포로 옮겨진 때는 임진왜란 이전이었다.

[내용]

임진왜란 이전에 다대포진으로 승격하였다. 1654년(효종 5) 다대 첨사는 목장의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하였다. 1751년(영조 27)에 다대진을 왜적이 침입하는 길목이라 하여 변방의 중요 관리가 거쳐 가는 이력지로 중시하였다. 첨사 밑에는 군관 14명, 진리 24명, 지인 13명, 사령 10명, 군뢰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병선으로는 전선 2척, 병선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다. 다대진에는 서평리, 장림리 등 15개 리가 속하였다.

[변천]

조선 전기인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다대포영으로 나타난다. 목도의 왜군을 물리친 후 첨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경상 좌도 칠진 체제의 하나로 존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군제 개혁으로 진이 없어졌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에 부산 지역의 수군의 중요성과 진관 체제(鎭管體制)를 알려 주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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