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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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倉 |
영어의미역 | Busan Warehouses |
이칭/별칭 | 부산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신창동|서구 충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동철,신명호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지역에 있던 동래부 소속의 창고이자 무역 기구.
[제정 경위 및 목적]
부창(釜倉)은 왜관의 일본인에게 제공되는 공작미(公作米) 등 각종 곡식을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창고이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東萊府誌)』[1740],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759·1832·1871], 『변례 집요(邊例集要)』,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872 군현 지도 부산진 지도(1872郡縣地圖釜山鎭地圖)」, 동래 접왜 절목[1750] 등에 기록이 실려 있다.
[내용]
1740년(영조 16) 편찬된 『동래부지』 창고조에 의하면, 부창은 좌기청(座起廳) 3칸, 공작미고 42칸, 요미고(料米庫) 16칸, 일공고(日供庫) 14칸, 별고(別庫) 6칸, 대동고(大同庫) 24칸, 외상고(外上庫) 3칸, 남문 1칸, 동문 1칸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래부 남쪽 20리 지점의 부산진 밖에 있었다. 1759년(영조 35) 편찬된 『동래부 읍지』 창고조에 의하면 동래부 남쪽 20리 지점의 부산진성 안에 있었다.
다만 1832년(순조 32) 편찬된 『동래부 읍지』 창고조에는 부창·일공고·공작미고·대동고가 각각 별개 항목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왜료미 2,670석 11말 9되 1홉 3작, 왜료태(太) 822석 8말 6되를 매년 항정(恒定)[항례적으로 정해진 것]하여 받아, 연례 송사와 별차왜에게 급료(給料)하고, 남으면 회록(會錄)[전세나 환곡 등의 세곡을 징수할 때, 자연 감모를 보충하기 위해 거둔 1할의 모곡(耗穀)을 다른 목적에 쓰기 위하여 일부를 떼어 용도가 다른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하고 부족하면 가획(加劃)한다고 하였다.
부창을 담당하는 색리는 부창색(釜倉色)이었다. 부창은 이름은 창고이지만, 단순한 무역 창고의 기능을 한 것이 아니라 무역 기구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1872 군현 지도 부산진 지도」에 부창이 그려져 있다.
동래로 하납된 공작미와 공목은 부창[부산창]과 공목고(公木庫)에 보관되었다. 공작미는 부창으로 운반되었다. 공목은 동래부의 공목고에 운송되었지만, 공작미와 함께 하납될 경우 부창으로 운반되는 경우도 있었다. 공작미 등 왜공미(倭供米)가 경상도 각 지역의 하납 읍에서 부산진의 부창으로 운송되는 과정, 부창에 보관되는 동안, 부창에서 왜관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포흠(逋欠)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포흠을 막고, 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하여 여러 사목[절목] 등 규정이 만들어졌다.
[변천]
부창 소속의 부속 건물은 일시에 건립된 것이 아니다. 1626년(인조 4) 부사 유대화(柳大華)가 좌기청(座起廳)을 건립하였다. 1651년(효종 2) 부사 윤문거(尹文擧), 1652년(효종 3) 부사 임의백(任義伯), 1655년(효종 6) 부사 한진기(韓震琦)가 건물을 추가로 건립하였다. 1679년(숙종 5) 부사 이서우(李瑞雨)가 건물을 중창하였다.
1700년(숙종 26) 부사 김덕기(金德基)가 대동고(大同庫)와 오일고(五日庫)를 중창하였다. 1740년(영조 16)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외상고(外上庫)를 이건하고, 고자방(庫子房) 1칸, 대문 1칸, 마구간 1칸을 새로 건립하였다. 부창 내에는 외교나 무역과 관련된 건물이 증설되었다. 동래부의 대일(對日) 외교와 무역 업무의 확대 및 재정 확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부창이 확대 중수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부창은 조선 후기 동래부 소속의 창고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특히 부창 안에 있는 공작미고는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창고이었다. 조선 후기 공작미[하납미]의 운영과 공무역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