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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93
한자 韓震琦
영어음역 Han Jingi
이칭/별칭 치규(稚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수안동 421-5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구지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
대표관직 동래 부사
출생 시기/일시 161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9년 -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55년 4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동래향교 외삼문 건립
활동 시기/일시 1656년 11월연표보기 - 동래 부사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60년 - 수원 부사에 임명, 유배
몰년 시기/일시 1665년연표보기 - 사망
부임|활동지 동래부 동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421-56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치규(稚圭). 아버지는 진사 한문두(韓文斗)[1588~?]이다.

[활동 사항]

한진기(韓震琦)[1610~1665]는 1649년(효종 원년) 문과 급제 후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1655년(효종 6)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따르면 한진기는 1655년 4월 동래에 부임하였다. 경상 좌수사와 갈등을 일으켜 함께 조정에 불려가 조사를 받은 후 1656년 11월 부사직에서 물러났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글에 의하면 한진기는 동래 부사로 있을 때 여러 가지 계책을 써서 일본의 사정을 성공적으로 정탐하였기에 조정에서 상을 주려고 하였으나 이후원(李厚源)[1598~1660]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1655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를 접대하였고, 1656년 동래 향교[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235]의 외삼문을 건립하였다. 이후 승지를 거쳐 수원 부사가 되었다. 1660년(현종 1) 수원 부사 재임 시 군무(軍務)에 대해 거짓 보고를 올렸다 하여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승지에 임명되었다. 1665년(현종 6) 안동 부사로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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