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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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祭祀儀禮 |
영어의미역 | Ancestral Rites of the Joseon Dynasty |
이칭/별칭 | 조선 시대의 향사 의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신명호 |
[정의]
조선 시대 동래부의 공적 제사 의례와 『주자가례』에 입각한 사적 제사 의례.
[공적 제사 의례]
『동래부지(東萊府誌)』에 의하면 동래부에서 공식적으로 거행하는 유교 제사에는 사직을 비롯하여 문묘(文廟), 여단(厲壇), 절영도 신사(絶影島神祠), 고지도 신사(古知島神祠), 충렬사(忠烈祠) 등이 있었다. 조선 왕조의 국가 의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기준으로 하였고, 가정의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준으로 하였다. 『국조오례의』와 『주자가례』에 규정된 의례는 근본적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했다는 면에서 유사하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 등 이른바 삼례를 비롯하여 명나라의 유교 예제, 『주자가례』등을 연구하여, 국가의 공적 제사 의례와 양반의 사적 제사 의례를 면밀하게 마련하였다.
조선 시대 공적 제사 의례는 그 중요성에 따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3등급으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대사에는 종묘제와 사직제가 있었다. 나라의 토지신과 곡식신을 한양에 모신 것 이외에 각 지방별로 그 지역의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셨다. 목사나 부사 등의 지방 수령은 왕을 대신하여 일정 지역의 백성들을 다스렸으므로, 자신들이 관할하는 지역의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이를 주현 단위의 사직이라고 하였다. 이들 유교 제사는 『국조오례의』에 입각한 중앙의 국사 사전이 동래의 지방 사전화(祀典化)되어 거행되는 공적 제사 의례였다.
[사적 제사 의례]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은 유교 이념의 핵심 가치인 효와 충을 중심으로 국가와 가정을 유교화하였으며, 그것은 관혼상제 등의 의례를 유교화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조선 시대 사람들의 죽음과 매장에 관련된 상장례도 유교 의례에 입각하여 재편되었다. 조선 시대의 유교 지식인들은 중국의 유교를 기본으로 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는 유교 의례를 재창조하여 실천하였다. 그런 의례는 학파나 당파 또는 개인의 의례 연구에 따른 예론(禮論)이라 약간씩 달라졌다. 조선 시대 동래 지역은 크게 보아 영남학파에 속하였다. 따라서 동래 지역의 유교 제사 의례 역시 남인의 유교 예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의의]
조선 시대 유교의 제사 의례는 삼국 시대 이래의 불교 의례를 유교 의례로 바꾸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의례로서,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 및 예악 문화의 이론과 실제를 대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