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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 만호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846
한자 天城萬戶鎭
영어의미역 Cheonseong Military Bas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161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일원 가덕도의 천성에 설치된 경상 우수영 소속의 만호영.

[제정 경위 및 목적]

가덕도천성진성(天城鎭城) 부근은 부산과 진해 쪽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지로서 예부터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이었다. 세조 때부터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각 지역에 읍성과 진보(鎭堡) 등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에 왜적이 침입[사량진 왜변]하자, 이곳 방어의 필요성을 크게 느껴 진보를 쌓고 만호(萬戶)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되었고, 조선 후기까지 군사적 요충지로서 사용하였다.

[관련 기록]

『간이집(簡易集)』 2권, 기(記)에 천성진(天城鎭)이 설치되고, 정원루(定遠樓)가 세워지게 된 내력에 대해 1546년(명종 1) 연간에 김해 도호부의 사문(斯文) 권연(權璉)이 당시 만호이던 장군 최수인(崔守仁)을 위해 써 준 기문(記文)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39년 갑진조 계본은 다음과 같다. “가덕진(加德鎭)·천성진은 노비를 정하여 주며, 적량(赤梁)은 성안에 물이 없으니 샘이 있는 곳으로 옮기며, 양산(梁山)·곤양(昆陽)의 수령은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용]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벽은 길이 960m이고, 폭 4.5m, 높이 3.5m 정도이다. 성의 서쪽과 북쪽에는 옹성(甕城)이 설치된 것 같으며, 동쪽에는 문이 없고 성벽을 이중으로 돌렸다. 또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바깥으로 네모꼴의 치성(雉城)[성벽으로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관찰·공격하기 위해 성벽에서 바깥으로 돌출하여 쌓은 성곽 시설물]을 두어 방어력을 높였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垓字)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중기의 축성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성이며,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주로 방어를 위해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수장은 4품의 만호이었다.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4척이었다.

[변천]

천성 만호진(天城萬戶鎭)은 인근에 있는 가덕진 소속에 있던 만호영(萬戶營)이었으나, 얼마 후 천성진으로 승격되면서 본격적으로 성이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 정박해 있는 일본군 함대를 공격할 때 우리 수군의 후방을 지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한때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가 임진왜란 후에 복구되었고, 조선 후기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천성 만호진천성진성은 조선 전기의 축성 양식을 잘 보여 주는 성이며,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주로 방어를 위해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1989년 3월 10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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