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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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城鎭城 |
영어의미역 | Chonseongjin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천성포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1613|1614|1615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동욱 |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수군 진성.
[개설]
1872년에 제작된 『군현 지도(郡縣地圖)』를 보면 남쪽 바다 쪽으로 곶(串)의 돌출된 곳에 있는 어운정(禦運亭) 안쪽에 병선을 보호하는 석축 시설과 함께 성안에 동서남북의 4대문과 객사(客舍), 아사(衙舍), 통인청(通引廳),장청(將廳), 집사청(執事廳), 이청(吏廳), 포수청(砲手廳), 사령청(使令廳), 창고(倉庫) 등의 건물이 그려져 있으며 주변의 봉수, 요망사(暸望舍) 등의 군사 시설도 보인다. 성을 축조할 때 웅주(熊州)를 위시하여 인근의 김해, 함안군 등 7개 군민이 동원되어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건립 경위]
조선 초기의 영(營)과 진(鎭)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의 군사 조직이 세종(世宗) 말부터 중앙군이 감소하면서 지방군의 강화를 바탕으로 보완 수정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진관 체제(鎭管體制)[전국을 주진(主鎭) 아래 거진(巨鎭)을 단위로 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각 진영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지방 방위 체제]가 확립되어 조선 초기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반영되었다. 이때 경상도 수군은 부산포 진관과 제포 진관으로 편성되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으로 가덕도 부근에 진영을 만들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1544년에 사량진 왜변(蛇梁鎭倭變)이 일어나자 왜구 방어의 필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었다. 1522년(중종 17)과 1544년(중종 39)에 군제를 개편했을 때 부산포 진관과 가덕 진관, 미조항 진관 등 3개 진관으로 나뉘게 되었고, 가덕도의 동쪽에 있는 가덕 진관에는 옥포, 지세포, 조라포, 안골포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천성포와 가배량이 신설되었다. 천성진성은 당시 천성포보(天城浦堡)로 1544년에 축조되었으며, 이후에 천성진으로 승격되었다.
[위치]
천성진성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성동 서중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다.
[형태]
성의 규모는 잔존 높이 3.5m, 둘레 약 960m, 너비 4.5m이고, 평면 형태는 방형(方形)이다. 서쪽, 남쪽, 북쪽에는 옹성(甕城)[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에 원형(圓形)이나 방형(方形)으로 쌓은 작은 성]을 갖춘 문터가 확인되며, 동쪽에는 문터가 보이지 않고 성벽을 이중으로 돌렸다. 또한 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인 지점에는 성벽 밖으로 치성(雉城)[성벽에 붙은 적을 사살하기 위해 원형이나 방형으로 성벽에 붙여 쌓은 성]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였고, 성벽 외곽으로 해자(垓子)[방어를 위해 성벽 주위를 둘러 판 못]를 돌렸던 흔적이 있다.
[현황]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강서구 천선동 서중 마을 뒤편에 있는 천성교회 주변의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현재 성 안팎 모두 전답으로 이용되고 있다. 1989년 3월 10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가덕도는 일본 쓰시마 섬에서 부산·진해 방면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지로, 예로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는 길목이다. 이에 천성진성은 동쪽의 가덕진과 더불어 남해안의 바닷길을 지키는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