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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29
한자 朝鮮時代-社會構造
영어의미역 Social Structure of the Joseon Dynast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용출

[정의]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인구와 부세, 그리고 신분 변동의 전반을 알 수 있는 사회 구조.

[개설]

조선 시대 동래·기장 등지의 사회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관련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편이다. 그 가운데 조선 시대의 인구 통계 자료를 통해서, 당시의 사회 구조와 변동에 관해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동래·기장 등지의 부세(賦稅) 관련 자료, 특히 군역(軍役)의 운영 실태를 보면, 지역 주민이 특별히 무거운 군역 부담을 지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부역 제도의 폐단은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근대 사회의 신분제적 사회 운영 방식이 점차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인구와 주민]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인구 통계는 국역을 담당하는 인구만을 파악한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여기에 등재된 동래현(東萊縣)의 호구는 389호에 1,400명이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는 290호 2,416명이다. 이러한 호구 통계는 실제의 1/3 내지 1/5 정도만 파악된 것으로, 실제 호구는 약 1,200호에 7,000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더 많은 인구 관련 자료가 남아 있다. 실록 읍지 등의 통계를 통해 확인되는 동래의 호수는 1740년 5,641호로부터 1871년 7,662호에 이른다. 인구수는 1740년 1만 9099명에서 1832년 3만 2158명에 달한다. 이 통계 수치는 실제 인구보다 적게 반영된 것으로 보이며, 추정 호수는 약 7,521~1만 946호, 추정 인구수는 약 2만 7284~5만 3597명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전기 동래부(東萊府)의 인구에 비하면 큰 폭으로 증대한 것이다. 동래 지역이 상업과 외교의 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외부로부터 인구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에 작성된 해운대 『동하면 호적 대장(東下面戶籍臺帳)』에 등재된 가옥은 모두 초가였으며, 기와집은 1채도 없었다. 1904년 『동래군 가호안(東萊郡家戶案)』에서도 동래군(東萊郡) 8개 면 4,779호 가운데 기와집은 89호[1.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18~20세기 초 동래의 지배적인 가옥 형태는 초가였으며, 기와집의 비중은 극히 낮았을 것으로 보인다. 초가로 표현되는 하층민, 주로 영세 소농·빈농층의 구성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장현(機張縣)의 호수와 인구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74호에 397명, 1759년(영조 35)의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3,064호에 1만 1581명, 1855년(철종 6)의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는 2,726호에 1만 25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호구 통계는 동래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실제 인구의 일부만 등재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후기 인구 증가의 추세는 기장현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분제의 동요와 군역 제도의 폐단]

조선 시기의 부세 제도는 신분제적 사회 구조의 성격을 반영한 채 운영되었다. 특히 신역(身役)을 중심으로 한 부역(賦役)의 제도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면이 있었다. 조선 전기의 농민들은 전세와 공납(貢納) 등 현물 조세를 부담하고 한편으로는 신역과 요역 등 부역 노동을 담당하였다.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모든 남자에게 부과하는 신역에는 군역과 직역(職役)이 있었다. 신역의 근간을 이루는 군역은 양인이 부담하는 역이라 하여 양역(良役)이라 불렀다. 신역은 특히 사회적 신분과 상관관계를 이루었다. 신분적 차별을 전제로 신역제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군역제는 특히 양인층에게 물납의 군역세(軍役稅)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운영 방식이 바뀌었다. 동래부의 주민들은 무거운 군역 부담, 곧 과도한 군역세 부담을 강요당하였다.

조선 초기 동래현에서 양인 출신의 군정은 시위군(侍衛軍) 영진군(營鎭軍) 수성군(守城軍) 기선군(騎船軍)의 정정(正丁) 또는 봉족(保丁)으로 복무하였다. 조선 초기에 동래현의 인구 3,043명중 남자가 1,493명이었다. 이 가운데 군정은 시위군[京軍] 11명, 진군(鎭軍) 71명, 수군(水軍) 130명으로 모두 212명이었다.

동래현의 잡색군(雜色軍) 직역을 살펴보면, 본관인 동래현의 아전 및 속료 하전, 본관 및 동래진(東萊鎭)·좌도수영(左道水營)·다대포진(多大浦鎭)·해운포진(海雲浦鎭)의 관노(官奴), 절영도·석포(石浦)·오해야 목장의 목자(牧子), 휴산역(休山驛)·소산역(蘇山驛)의 역리(驛吏), 염간(鹽干), 공장(工匠), 응봉 봉수대·구봉 봉수대·간비오 봉수대·계명산 봉수대의 봉수군, 중앙 각 관청의 관노비 등이다.

조선 후기 동래부의 군액(軍額)은 크게 증가하였다. 1806년(순조 6) 동래부에는 수포방군(收布防軍) 1,574명, 수포유황군(收布硫黃軍) 300명, 속오군·아병·봉군·파발군·목자 등이 3,320명, 충익위의 선무군관(選武軍官)·진상군(進上軍)·탄군(炭軍)이 73명, 좌수영 및 각 진포(鎭浦) 수군이 2,188명, 각종 명색의 보인(保人)·장인·악공 등이 612명, 향교 및 각 아문 소속이 611명, 왜관의 연향청 소속이 130명, 각 청 무사 군졸 및 삼반(三班) 관속이 1,950명으로 모두 9,760명이었다. 남정(男丁) 수 1만 4641명 가운데 면역자 8,111명을 제외하면 응역 남정은 6,630명이었다. 기장현의 군액도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크게 증대하였다. 1759년(영조 35)의 『여지도서』에서 1,269명이었던 군총(軍摠)은, 1794년(정조 18)의 『군국총목(軍國摠目)』에서 2,422명, 1832년(순조 32)의 『경상도 읍지(慶尙道邑誌)』에서는 2,185명에 달하였다.

군역 의무자인 양인층 가운데 면역자를 제외한 수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군역이 부과되었으므로 양인층에게는 군역의 중첩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가 동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양인층을 대상으로 한 군역 액수를 고집하는 데 따른 모순이었다.

더욱이 18·19세기 동래는 읍세가 잔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국방상 요충지에 위치한 까닭에 군액이 크게 증가해 있었다. 수영과 휘하의 진보, 그리고 동래부 등 수군과 육군의 각종 관방 시설이 집중되었고, 동시에 이를 유지·운영해 나가는 데 필요한 군액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군역의 액수는 많은데 양인의 인구는 감소하는 현상, 곧 ‘군다민소(軍多民少)’의 폐단이 이곳에 살던 양인층의 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불안정한 사회 정세는 동래부·기장현 등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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