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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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統一新羅時代-社會構造 |
영어의미역 | Social Structure of the Unified Silla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사회 구조.
[골품제와 사회 구조]
통일 신라 시대의 사회 구조는 기본적으로 전제 왕권을 바탕으로 골품제에 기초한 신분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 사회는 영토 확대와 인구 증대로 인해 통일 이전과는 달리 골품제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성골이 사라지고, 1두품에서 3두품의 두품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고 이들은 일반 백성과 비슷한 처지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최고 신분인 진골 귀족은 정치적·사회적으로 비중이 커서 중앙 관직을 독점하고 화백 회의의 전통을 계승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6두품 출신은 학문적 식견과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으나, 신분의 제약으로 중앙과 지방의 최고 장관의 지위에까지는 오르지 못하였다. 특히 대표적 6두품 출신인 최치원(崔致遠)은 일찍이 당(唐)으로 유학을 가서 당의 빈공과에 급제함으로써 6두품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신라의 귀족들은 식읍(食邑)을 비롯하여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시대가 내려오면서 신라의 귀족들은 토지 소유를 더욱 확대하여 대토지 소유의 일종인 전장(田莊) 경영을 확대하였다. 수도 경주는 더욱 발전하여 인구가 18만 호에 이르렀다는 기록과 금입택(金入宅), 절유택(節遊宅) 등 경주 귀족들의 부를 상징하는 택호(宅號)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일반 농민층의 생활은 일본의 토오다이지[東大寺]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 문서(新羅村落文書)」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라 정부는 서원경(西原京)[지금의 청주] 인근의 촌락에 대한 일종의 장적(帳籍)을 만들었는데, 그에 따르면 각 촌락의 호수, 인구 수, 전답 면적, 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의 수, 소와 말의 수와 그 변동 상황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따라서 신라 정부가 지방 사회에 대해 매우 철저하게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 농민층은 자신의 소유지인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을 가지고 있었고, 호의 등급을 9등급으로 나눈 호등제에 편제되어 있었다. 가장 낮은 등급인 하하연(下下烟)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아 열악한 농민층이 촌락에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 하대로 내려갈수록 빈부의 차이는 심화되었다.
[부산 지역의 사회 구조]
부산은 이 시기 동래군이었으므로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료에 지배층이 등장하는 것은 신라 말에 이르러서이다. 즉 신라의 중앙 집권력이 약해지면서 지방 세력인 호족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현재 부산은 통일 신라 시대의 동래, 기장, 김해 지역으로 구분된다. 다만 동래나 기장 지역에는 그러한 정황을 찾을 수 없고, 김해는 현재 부산과 접경하고 있거나 일부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부산의 지배층이 형성되는 과정의 한 단면을 설명하는 데 큰 무리는 없으리라 본다.
김해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기 이전부터 금관가야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이후 이 지역은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금관가야 왕족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그 시조에 대한 묘향(廟享)을 계속하도록 조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일부는 김유신(金庾信)처럼 신라 왕족인 진골 신분에 편성되어 왕경(王京)인 경주로 이주하고 신라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또 나머지 대부분은 그 본거지를 떠나지 않고 토착하여 수로왕(首露王)의 제사를 통해 혈족 의식을 다져 갔을 것이다. 그러한 인물로 김인광(金仁匡), 소충자(蘇忠子), 소율희(蘇律熙)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직위는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이나 ‘김해부 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였다.
김인광은 가야계 왕실의 후손으로 생각되지만, 소충자와 소율희는 이와 무관한 신흥 세력 집단이다. 이들의 부흥은 기존 가야계 주민들의 반발을 가져왔을 것이고, 이 점은 이후 소율희가 김율희로 개명을 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이 지역은 가야계 왕실 후손들이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얼마 못 가서 그 지배력을 상실하고 다른 정치 세력으로 지위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아직은 가야계 후손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편 부산 지역 농민층의 존재 양태는 동래, 기장, 김해 지역이 모두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군 예하의 많은 촌락에 거주하였던 농민층은 현재 수영 서쪽에 있는 배산(盃山) 동남쪽에 위치한 동래군 치소성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 공사에 노동력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또한 부산 지역에는 동래군의 형변 부곡·고지도 부곡과 같이 양민보다 사회·경제적 처지가 더 열악한 하층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특수 행정 구역도 존재하였다. 부곡 주민들은 군현제에 거주하는 양민보다도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였으며, 그중 소금 생산에 많이 동원되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