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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의 사회 구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16
한자 新石器時代-社會構造
영어의미역 Social Structure of the Neolithic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선사/석기
집필자 임상택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와 무덤, 유물 등을 통하여 본 당시의 사회 구조.

[개설]

사회 구조에는 사회 구성원의 인구 규모, 성원 간의 위계 구조, 경제생활의 기본 단위, 혈연관계와 혼인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한다. 선사 시대의 사회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고고학적인 분석 과정에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신석기 시대의 사회 구조는 유물이나 유구 자체의 특징을 통해서는 확인할 수 없고, 유물 간의 관계, 유구 간의 관계 등 비교 분석을 통하여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덤의 부장품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몇 개의 그룹이 확인된다면 이를 통해 사회의 위계 구조를 유추할 수 있고, 마을 내 집들의 분포 상황, 집의 규모, 집들 간의 차이 등을 통하여 생산과 소비의 단위, 가족 구성단위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사회 구조는 유적에서 발견되는 유구나 유물들의 출토 맥락과 비교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데, 한반도 남부 지역에 터전을 잡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핵가족 단위로 생활하였을 것이나 생업 활동은 공동 노동으로 하였을 것이다. 치레걸이나 부장품 등을 보면 집단 내 연장자나 특수 계층[의례 담당자]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경제적 측면에서의 위계나 신분의 고착화는 상정하기 어려운 사회라고 보인다.

[집자리를 통해 본 신석기 시대의 사회 구조]

동남해안 지역의 신석기 시대 사회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많지 않다. 일차적으로 사회 구조 판단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집자리나 마을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자료나 무덤 등을 통하여 부분적이나마 당시 사회 구조를 접근해 볼 수는 있다. 신석기 시대 남부 지역의 집자리는 이른 시기에는 한두 채씩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고 중기 이후에 5~10기에 이르는 집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게 된다. 이른 시기 집자리는 규모도 매우 작아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의 거처로 생각된다.

반면 중기 이후가 되면 집의 규모가 커져서 긴 변이 10m에 가까운 커다란 집자리도 등장하는데, 인구 규모가 좀 더 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커진 집자리 내에도 화덕 자리는 여전히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3대 이상이 거주하는 확대 가족이 기본 단위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는 청동기 시대 이른 시기의 집들이 이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내부의 화덕 자리도 복수로 존재하여 확대 가족의 거처로 생각되는 것과 대조된다. 각 집자리들 간의 현격한 차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집자리 출토 유물에서도 빈부 격차 등을 확인하기는 곤란하다. 즉 집단 내에서 구조적인 위계 차이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무덤을 통해 본 신석기 시대의 사회 구조]

신석기 시대에 빈부 격차나 집단 내 위계 차이를 단정 짓기 어렵다는 점은 무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 무덤이 확인된 예는 많지 않은데, 통영의 연대도,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가덕도 등에서 무덤이 확인되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 공동묘지도 더러 있으나, 부산 지역은 거의 단독 묘라 할 수 있다. 연대도와 가덕도의 예를 보면 각 무덤 간의 부장품에 차이가 확인된다.

일부 무덤은 조개 팔찌나 옥제 목걸이 등의 치레걸이, 토기 등이 부장되어 있는 반면, 대부분의 무덤은 부장품이 빈약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경제적 측면에서의 사회 내 위계를 반영한다거나 위계 구조가 세습되는 등의 양상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회 내의 연장자와 나머지 성원들의 차이 정도일 것이다. 어린이의 무덤에서 많은 부장품이 확인되는 예가 없다는 점, 무덤의 배치에서 우월하고 고립된 위치를 차지하는 무덤이 없다는 점도 위계 구조의 고착화가 없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던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당대의 연장자들은 살아생전에도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신분을 상징할 수 있는 물건의 존재도 옥제 목걸이, 조개 팔찌 등 일부를 제외하면 상정하기 어려운데 이 역시 신석기 사회가 내부적으로 분화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옥제 목걸이, 조개 팔찌 등이 집단의 일부에게만 착용되어 매장된 것을 볼 때, 동남해안 지역의 신석기 사회에서도 연장자나 의례 담당자 등 개인의 능력을 통하여 권위를 획득한 사람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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