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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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社會構造 |
영어의미역 | Social Structure of the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배진성 |
[정의]
부산 지역 청동기 시대의 사회 구조.
[개설]
문헌이 없는 선사 시대의 경우 물질 자료인 고고 자료를 통해 당시 사회의 집단과 계층 등을 연구한다. 청동기 시대에 농경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신석기 시대보다 정착 생활이 강화되었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욱 더 조직화와 세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을 전체의 공동 노동과 생산물의 분배 및 관리를 통제할 수 있는 우두머리의 역할도 중요해졌다.
이와 관련된 유구(遺構)로는 주로 주거지(住居址)·무덤·환호(環濠)[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도랑] 등이며 이를 통해 마을의 기능과 구조, 마을 간 및 마을 내의 계층의 차이, 계층에 따른 공간의 구분 등이 파악되고 있다. 유물에서는 청동 칼[동검(銅劍)]·간 돌칼[마제 석검(磨製石劍)]·옥(玉) 등을 통해 소유자의 신분과 사회에서의 역할 등을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청동 칼이나 간 돌칼이 출토되는 무덤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 지역에서는 아직 환호나 청동 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간 돌칼이 출토된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과 고인돌[지석묘]이 발견되어 청동기 시대의 부산 지역에도 신분이 높은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징과 의의]
주거지로는 반여동 유적, 노포동 유적, 온천동 유적과 기장 지역의 방곡리 유적, 가동 유적, 청강리 유적 등이 있으나, 대부분 1~2동(棟)에서 4~5동 정도만 확인되어 마을의 구조를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많다. 그나마 이 가운데 방곡리 유적에서 열여섯 동이라는 비교적 많은 주거지가 확인되어 마을 내에서 주거지 간의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방곡리 유적 가 지구 9호 주거지는 다른 주거지에 비해 규모가 크고, 환옥(丸玉)이 출토되었으며, 구릉의 경사면이 아닌 능선부의 평탄한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9호 주거지는 방곡리 유적 가 지구에서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주거지로 판단된다. 나 지구에서도 규모가 큰 평면 세장방형(細長方形) 주거지들은 단독으로 배치되어 있어 장방형(長方形) 주거지와 차이를 보이며, 간 돌칼이 출토되고 있어 마을 내 계층의 차이를 보여 준다.
무덤 유적으로는 사하구 괴정2동의 돌널무덤에서 간 돌칼이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에 괴정동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하구 감천동에서는 여섯 기의 고인돌 가운데 2기에서 간 돌칼이 출토되어, 감천동 일대의 우두머리급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간 돌칼 한 점이 출토된 사직동 돌널무덤 역시 같은 성격으로 판단되며, 이 밖에도 간 돌칼이 출토된 유적은 적지 않다. 한편, 해안가에 인접한 가덕도 두문 고인돌은 정식으로 발굴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입지로 볼 때 청동기 시대 가덕도 사람들의 어로 활동과 관련한 제사를 이끌었던 사람의 무덤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온천동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 전기와 후기의 주거지와 환호가 확인되었으며 지배층과 일반 구성원의 거주 구역을 구분하고 있어 청동기 시대 부산 지역의 사회 구조를 밝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부산 지역 청동기 시대의 사회는 주거지·무덤·출토 유물에서 계층이나 신분의 차이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비교적 상위 계층의 사람들이 공동 노동, 생산물의 관리와 분배, 제사 등을 주도하면서 유지해 가는 구조의 사회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