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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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社會構造 |
영어의미역 | Social Structure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권덕영 |
[정의]
삼국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의 생활 형태와 사회 구조.
[개설]
일반적으로 기원후 4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 만주와 한반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를 건설해 서로 경계를 접하며 대립 경쟁하던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한다. 부산 지역은 초기에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었다가 후에 가야 연맹체에 포함되었다. 그 후 신라의 팽창으로 부산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독로국은 지금의 동래 지역으로 비정되거니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동래는 옛 장산국(萇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인데, 신라가 이를 빼앗아 거칠산군(居漆山郡)으로 두었고 소속 영현(領縣)으로 대증현(大甑縣)[부산진구]과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기장군]을 두었다고 한다.
[독로국 시기]
먼저 가야 시기 부산 지역의 사회 구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독로국은 중심 지역과 다수의 일반 지역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회 구조의 측면에서는 독로국의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 지배층과 일반 평민층 그리고 천민으로서 노비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을 만든 집단은 독로국의 핵심 지배 계층이고, 주변 지역의 크고 작은 무덤은 그 외의 일반 지배층들이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 편입 이후]
이러한 사회 구조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 다소 변동이 생겼다. 일반적으로 신라는 다른 지역을 무력으로 병합하면 그 지역의 지배 계층을 강제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러한 사례에 비추어 보면, 부산 지역이 신라에 병합되면서 왕족을 비롯한 귀족 지배층들은 왕경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을 것이다.
종전의 거대한 외형과 풍부한 부장품을 가지고 있던 고분들이 사라지고 중·소형 묘로 된 새로운 고분군이 부산 전 지역에 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 변화를 보여 준다. 신라 지배하의 부산 지역은 군현으로 편제되었는데, 중심 지역에 거칠산군[동래구·금정구·연제구·수영구·해운대구]이 있었고, 소속 영현 지역으로서 대증현[부산진구·동구·남구·중구·서구]과 갑화량곡현이 있었다. 지금의 부산광역시와 비교하면 낙동강 연안의 북구·사상구·사하구·강서구를 제외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을 정도로, 보통 시·군 크기의 다른 국들보다는 큰 나라였다. 군현의 내부에는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큰 마을이 중심이었고, 주변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편 부산 지역은 낙동강 하구의 평야 지대에 자리하고, 바다와 인접해 있었으므로 그곳 사람들은 주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비록 후대의 사실이지만, 후삼국 시대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지금의 영도로 추정되는 절영도(絶影島)의 말을 고려 왕건(王建)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하듯이 부산 지역의 섬 곳곳에 목장이 있었다. 또한 바닷가 주변에는 염전이 산재하여 소금을 생산하였다. 삼국 시대의 부산 지역의 생활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