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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15
한자 三國時代
영어의미역 The Three Kingdoms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백승충

[정의]

고구려·백제·신라 및 가야가 병립하였던 시기의 부산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국 시대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마한·변한·진한 등 삼한 시대 정치체를 계승한 백제·신라·가야가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는 3세기경부터 668년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까지를 말한다. 삼국 및 가야 이외에 부여나 옥저, 동예 등 여러 정치체가 공존한 시기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만이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완성하였고, 일정 시기 가야와도 병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아울러 삼국 시대로 지칭하고 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고대 국가로서 기틀을 잡은 것은 고구려였고, 이후 백제·신라가 점진적으로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다만 변한을 계승한 가야는 부산 지역을 포함하여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이서, 섬진강 이동에 여러 정치체로 흩어져 있었는데, 멸망할 때까지 하나로 통합된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삼국 시대의 부산 지역에는 삼한 시대의 독로국을 계승한 거칠산국이 있었는데, 인접한 김해 가락국[금관가야]과 정치·문화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는 등 이른 시기의 가야 지역 가운데서는 가장 강력한 연합 정치체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남정 이후 신라가 낙동강 하류 지역에 대한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낙동강 이동의 부산 지역은 이른 시기에 신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 멸망을 전후해서는 신라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에 부산의 거칠산국은 신라의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고, 경덕왕(景德王) 대에는 동래군으로 개명되었다.

[변천]

삼국 시대의 부산 지역은 가야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한조(韓條)에 의하면 변한 12국 중 독로국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거칠산국[혹은 장산국·내산국]이 삼한 시대에서 삼국 시대 중반까지 존재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를 통해 볼 때에 부산 동래에 위치한 독로국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김해 구야국 및 함안 안야국 가까이에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통해 왜와 통하기 쉬운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의 ‘독로국’은 김해의 ‘구야국’과 정치·문화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한편, 철을 중심으로 한 대외 교섭을 통해 변한의 주요 소국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 시대 독로국은 ‘대국(大國)’인 구야국과 안야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위상이 낮았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에 들어 독로국을 계승한 거칠산국은 신라의 팽창 이전인 4~5세기 전반까지 낙동강 하류의 가장 유력한 가야의 정치체로서 상당한 수준의 정치·문화를 가지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꾀하는 동시에 김해 가락국[금관가야]과 연합하는 등 동질적인 정치체로 존재하였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유적과 출토 유물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 지역은 5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가야 지역 가운데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그 독자성을 상실하고 편입되고 만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이어 조영된 연산동 고분군은 가야적인 요소가 많이 사라지고, 신라의 이 같은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된 유적이다.

가야 세력권이었던 부산 지역이 이른 시기에 신라로 편입되는 데에는 고구려 남정(南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듯하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은 400년에 5만 군사를 보내어 백제·왜와 연합하고 있던 낙동강 유역의 가야 세력들을 초토화시켰다. 고구려 남정은 기존 가야 지역 세력의 재편을 가져오는 한편, 신라의 낙동강 하류 진출의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황령산 아래 배산에 위치한 연산동 고분군은 신라의 직접적인 지배 시기에 조영된 유적인데, 신라가 부산 지역 정치 세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 중심지를 이전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 편입된 부산 지역은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다가 경덕왕 대에 양주 소속의 동래군으로 개명되었고, 속현이었던 대증현(大甑縣)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도 각각 동평현(東平縣)과 기장현(機張縣)으로 개명되었다.

[사회와 경제]

부산 지역에서 삼국 시대 고분군이 28여 개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주요 고분군은 대체로 온천천수영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고, 소형분도 이들 하천의 지류나 해안에서 확인된다. 입지 조건으로 볼 때 소형분들이 위치한 곳에는 삼한 시대 이래 개별 읍락·촌들이 존재하면서 국읍인 동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4~5세기 대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 피장자 집단은 부산 지역의 대표 정치체로서 화명동 고분군·당감동 고분군·오륜대 고분군·반여동 고분군·두구동 고분군·기장 청강리 고분군 조영 집단 등을 그 지배 관할 아래 두었을 것이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 대가 되면 연산동 고분군 집단이 새로운 정치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두구동 임석 고분군·덕천동 고분군·해운대 좌동 고분군·초량동 고분군·노포동 작장 고분군·선동 신천고분군 조영 집단 등을 그 관할 아래에 두었을 것이다. 이후 부산 지역에서는 대형 고분군이 조영되지 않았는데, 신라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 시대 거칠산국의 중심지와 주변 읍락·촌과의 관계는 삼한 시대와 거의 동일한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군사권·제사권, 공동 시설의 축조와 이용, 물자의 집산과 분배, 대외 교역권 등 나라 전체 차원의 이익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 중심 집단은 읍락과 촌의 협조 아래 기본적인 통제권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삼국 시대 부산의 대표적인 정치체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 피장자 집단은 대내외 교역상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가진 온천천 수계에 위치하면서 철의 생산·집산·분배에 있어 그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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