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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387
한자 伽倻
영어의미역 Gaya
이칭/별칭 가라,가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백승옥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부산 및 경상남도 일대에 존재한 나라.

[개설]

가야(伽倻)는 국명이지만 가야가 존재하였던 당시의 이름은 아니다. 당시의 국명은 가라이었다. 가라가 어느 순간부터 가야로 고쳐져 불렸다. 그리고 한 나라 또는 두 나라만을 지칭하는 국명이었으나, 여러 나라 전체를 통칭하기도 하였다. 가야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면 사서(史書)마다 차이를 보인다. 또한 동일 사서 속에서도 각기 다르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

가야를 지칭하는 말로는 가라(加羅), 가라(伽羅), 가라(迦羅), 가라(呵囉), 가라(枷羅), 가라(賀羅), 가량(加良)[이상을 가라계라 지칭한다]과 가락(駕洛), 가락(伽落)[이상을 가락계라 지칭한다], 가야(加耶), 가야(伽耶), 가야(伽倻)[이상을 가야계라 지칭한다]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동일어에 대한 다른 표기이다. 그러나 이들이 표기된 출전 사료의 편찬 시기를 정리해 보면 가라계만이 가야가 존재한 당시의 국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락계와 가야계는 12세기 이후에 편찬된 사서에만 보일 뿐, 그 이전에 편찬된 사서에는 가라계만이 보인다. 특히, 동시대 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도 가라계 차자 표기를 하고 있는 점은 유의된다. 이 중에서 가야계 용어는 이른바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 기록에 보이지만, 초기 기록은 신빙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가야계 용어가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없다.

가라계 용어가 가야계로 바뀌어 표기된 것은 아마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식의 아름다운 말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바뀐 시기는 12세기 『삼국사기』 편찬 시 일괄적으로 고쳐 적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신라 말 고려 초의 시대적 상황에서 가야란 말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어원]

가야의 원래 말인 가라의 어원에 대해서는 머리에 쓰는 관책(冠幘) 유래설, ‘개간한 평야’라는 뜻의 남방 잠어인 카라(kala) 유래설, 갓나라[邊國·一邑] 유래설, 가람[江] 유래설, 겨레[族] 유래설, ‘한(韓)의 나라’ 유래설 등이 있다. 한(韓)의 다른 차자 표기법이 가라인 점과 ‘한(韓)’과 ‘간(干)’이 통한다는 점에서 한의 나라 유래설이 유력하다. ‘간(干)’은 존장자, 존귀자의 의미도 있지만 ‘크다[大]’의 뜻도 있다. 따라서 가라는 ‘칸[干]의 나라’, 즉 ‘큰 나라’의 의미로 생각된다.

고대 부산 지역에도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 축조 집단을 중심으로 독로국(瀆盧國)이 있었는데, 가라의 ‘라’와 독로국의 ‘로’는 음이 다를 뿐 같은 뜻이다. 그리고 독로국의 ‘독(瀆)’은 물가를 의미하므로, 부산 지역의 자연 지리적 특성상 물가의 나라라는 뜻과 부합된다.

[가라와 임나가라]

가야의 원래 국명인 가라는 두 개의 나라가 사용하였다. 고대 김해에 존재하였던 나라와 고령에 존재하였던 나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이들을 각각 금관가야와 대가야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이는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에는 모두 가라이었다. 표기상 구분이 필요할 경우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예처럼 김해의 가라를 남가라로 표기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남가라를 임나가라로 표기하였는데, 임나는 ‘남쪽의 땅’이란 의미이다. 고대 부산 지역과 김해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야사의 시작과 끝]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언제 발생·성립하여 언제까지 존립하였는가? 가야의 끝은 고령의 대가야[가라]가 멸망하는 562년이다. 문제는 가야의 성립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반적으로는 기원전 1세기부터 가야 소국들이 성립하였다고 보지만, 그 이상 소급해 볼 여지도 있다. 즉, 삼한 중 변한 소국들이 성장 발전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경우, 가야의 시작은 변한 소국의 성립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왕 준(準)이 중국으로부터 망명한 위만(衛滿)에게 쫓겨 남하할 때인 기원전 194년 무렵 이미 한(韓)의 존재는 보인다. 혹자는 이때부터를 한의 시작으로 보고 있으나, 한은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삼한 ‘소국’의 형성은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로 보아도 될 것이다. 소국의 형성은 삼한 지역 중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어 마한 지역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소국의 형성을 보았으며, 변한·진한 지역은 다소 뒤처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시기 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진한도 이미 기원전 3세기 무렵에 마한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고, 진한과 변한은 거의 동시에 성립된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고대 부산 지역의 남가라도 기원전 3세기부터 소국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영역]

가야의 영역에 대해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그 경계를 “동으로 황산강[낙동강 하류], 서남은 창해[남해안],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의 남쪽”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책 오가야조(五伽耶條)에는 이 범위를 벗어나는 가야 국명들이 나오고 있다. 즉, 현 창녕 지역에 존재한 비화가야는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며, 고령가야와 성산가야도 이 영역을 벗어나는 곳에 위치한다. 이로 보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경계는 전체 가야의 역사 중 어느 한 시기의 영역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사서에서의 엇갈린 서술은 그동안 가야사의 이해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 왔다. 고대 부산 지역도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영역에는 속하지 않지만 한동안 가야에 속하던 곳이다. 『일본서기』 속에서 임나라고 인식하는 나라들의 범위를 가야의 영역으로 본 것은 일제 관학자들의 전통적인 견해이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고구려·백제·신라와 함께 ‘조공’해 오는 ‘번국(蕃國)’이며, 천황의 ‘내관가’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일본서기』 편찬 시 율령 국가 지배층의 대외 인식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임나 인식은 7세기 말 일본 지배층의 국가 의식과 설화적 역사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이러한 위험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임나’를 고구려·백제·신라와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야의 영역은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에 보이는 임나 10국과 [남]가라, 탁기탄(啄己呑)[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으로 비정됨] 탁순국(卓淳國)[지금의 경상북도 대구로 비정됨]이 존재하였던 지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야 여러 나라들의 존재 형태]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상호 간에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가야 여러 나라들이 서로 연맹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른바 ‘가야 연맹체설’은 『삼국유사』 오가야조를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가야는 일시적 그리고 지역적 연합이나 동맹은 존재하였으나,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 연맹체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신라, 백제 이외는 모두 가야라는 인식은 후대의 역사 인식일 뿐이다. 가야 제국이 존재하였던 당시의 역사적 실상이 아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처음부터 소국의 형태로 형성되어 각각 성장 발전하다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지 못하고 망하였다. 고대 부산 지역의 경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축조하였던 집단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을 축조하였던 집단이 서로 정치 연합을 이루어 이른바 금관가야 즉 남가라를 형성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가야 문화의 성격]

가야 문화의 성격으로 첫 번째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토착성이다. 가야 지역은 이전의 선사 시대부터 수렵·어로·농경 문화를 지속적으로 계승한 위에 이루어진 것이다. 고대 부산 지역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로는 지역별로 그 특성이 다양하게 표출된다는 점이다. 지역마다 독특한 토기 양식이 성립되는 것은 물론, 토우(土偶)나 투창(透窓)으로 의식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냈다. 뱀 모양 토우가 붙은 가라국[대가야]의 통형 기대(筒形器臺)와 안라국[아라가야]의 불꽃 무늬 토기, 뚜껑의 손잡이 모양이 독특한 창녕의 굽다리 접시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고대 부산 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로는 외절 구연 고배(外切口緣高杯)[아가리 부분이 바깥으로 굽은 굽다리 접시]를 들 수 있다.

고분 양식도 지역에 따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구덩식이 주종을 이루며, 대형의 경우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경우가 많으나, 함안 지역의 경우와 같이 대형의 분묘라 하더라도 부곽이 없는 세장형(細長形)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내부 시설 면에서 선반 시설이나 나무 구조물을 이용한 흔적이 존재하기도 한다. 세 번째 이러한 가야 문화의 다양성은 지형적인 조건에 규제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제국들은 낙동강의 본류, 혹은 지류 상에 분지를 중심으로 일정한 폐쇄성을 가지며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번째로는 폐쇄성과 동시에 외래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갖고 있다. 전기 가야의 중심지인 부산·김해 지역은 일찍부터 교역과 교류를 통해 발전하면서 많은 외래문화가 유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의 기사에도 보이며, 부산 복천동 고분군, 김해 회현리 패총(金海會峴里貝塚), 김해 대성동 고분군 등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다섯 번째로는 독자적인 창의성을 보인다. 토기의 경우 여성적인 유연한 곡선과 다양한 문양 장식 및 투창, 독특한 표현 양식은 가야만이 가진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외래문화도 단순히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재창조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다. 백제에서 들여온 고리 자루 큰 칼[環頭大刀]는 가야에서 더욱 정교한 문양을 가진 용봉 환두 대도(龍鳳環頭大刀)로 만들어 내고 있다.

가야금 역시 가야인의 독자적인 창의성을 잘 보여 준다. 가야금은 기존의 대가야가 갖추고 있던 문화적 요소에 외래적인 요소 등이 절묘하게 조화된 문화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가야금을 통한 악곡의 제작은 음악의 정치적인 기능을 잘 활용하며 새로운 문화를 가야의 것으로 소화해 낸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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