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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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時代-祖上崇拜 |
영어의미역 | Ancestral Rit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주헌 |
[정의]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 행해진 조상 숭배 모습.
[무덤에 나타난 조상 숭배 사상]
인류가 망자를 위해 무덤을 만든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무덤이라는 확실한 형태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원시인들은 인간의 생명도 봄이 되면 되살아나는 자연계의 생명처럼 부활하기를 열망하고 믿었다. 그들은 생명이 다한 조상들도 사후 세계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영생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를 위해 고인이 평소에 사용하던 간단한 도구나 생활용품 등을 무덤에 정성을 기울여 함께 묻었다.
원시인의 이러한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은 청동기 시대와 삼국 시대를 거치면서 정형화된 형태의 조상 숭배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는 죽은 사람의 가옥(家屋)을 표현하고 생전에 망자(亡者)의 위엄과 생활상, 시중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신라의 고분처럼 막대한 양의 부장품을 무덤에 넣는 까닭도 망자의 부활을 고려한 것이며 조상에 대한 최고의 대우였던 것이다.
[부산 지역 유적에 나타난 조상 숭배 사상]
삼국 시대 부산 동래 지역에 축조된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는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지극한 숭배 의식을 보여주는 예들이 많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짚신 모양의 상형 토기(象形土器)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것으로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옮겨주는 매개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늘을 나는 새도 죽은 자의 영혼을 운반하는 신령스런 존재로 인식하였는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도 새 모양의 토기가 일정 규모를 갖춘 큰 무덤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장례 의식에 나타난 조상 숭배 사상]
삼국 시대는 엄격한 신분 사회였으므로, 지배자들은 자신의 우월한 정치·경제·사회적인 지위를 과시하고 이승에서 누렸던 안락한 생활을 저승에서도 향유하기 위하여 무덤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러한 후장의 풍속은 삼국 시대에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거대한 무덤을 조성하는 것이 바로 조상 숭배의 정도를 측정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보았다. 특히 신라와 가야의 많은 무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엄청난 규모의 봉분(封墳)과 막대한 양의 토기와 철제품으로 구성된 부장품은 삼국 시대 사람들의 조상 숭배에 대한 인식의 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장품은 토제와 철제로 만든 간단한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무구류, 마구류, 각종 귀금속제 장신구가 주류를 이루며 중국이나 일본 등지의 외국에서 수입한 진귀한 물건들도 모두 망자를 위해 무덤에 다량 부장되었다. 더구나 부장용으로 만든 수백 점에 달하는 토기들은 원거리에서 제작되어 무덤까지 안전하게 운반한 후, 조상을 기리는 몇 차례의 의식을 거친 뒤에 모두 무덤에 부장하였다.
특히 5세기 대 부산 지역 지배자의 무덤에는 죽은 망자를 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이라는 의식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조상에 대한 최고의 예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순장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와 함안, 창녕, 고령 등지의 가야 지역 대형 고분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30여 명을 동시에 순장한 거대한 가야의 무덤도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순장의 풍속은 6세기 전반 무렵까지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6세기 중엽 이후 굴식 돌방무덤의 유행과 더불어 순장도 서서히 사라져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는 박장(薄葬)이 유행하였다. 이때 박장의 풍습은 신라에서 불교가 수용되는 시기와 부합되는 현상이며, 부산 지역도 5세기 후반 이후 신라 영토로 편입되어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