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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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韓時代-社會構造 |
영어의미역 | Social Structure of the Three Han State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이재현 |
[정의]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정치체의 풍습 및 사회 질서.
[개설]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정치체의 구조와 풍습 및 사회 질서는 고고학적 발굴,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문헌을 통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헌 자료에 나타난 사회 구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변진(弁辰)이 12개국으로 되어 있다”라면서 12개국의 이름을 적어 두고 있다. 그중에서 독로국(瀆盧國)은 동래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시각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거칠산국(居柒山國), 『삼국유사』에는 장산국(長山國) 등의 명칭도 나온다. 이들은 동래나 해운대 일대의 부산 지역에 형성된 초기 정치체의 이름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이들 국의 규모에 대해 “대국(大國)은 4,000~5,000가(家), 소국은 600~700가의 규모”라고 적고 있다. 국의 중심지는 국읍(國邑)이고, 여러 작은 읍락(邑落) 또는 별읍(別邑)이 있는데, 각각의 거수(渠帥)는 규모에 따라 이름이 다르게 불렸다고 한다. 이들은 일정한 자연 지리적 경계 내의 중심 세력으로, 주변의 마을이나 세력을 다스리는 구조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거수가 있는 것은 종속적인 관계라기보다는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구려나 가야, 신라 등의 발전 과정에서 9간이나 6촌, 5부족 등이 연합하여 초기 국가를 이루는 현상과 유사하다. 그러다가 2~3세기 이후에는 점차 큰 세력 규모로 통합되어 고대 국가로 발전해 갔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자료에 나타난 사회 구조]
무덤의 부장품이나 형태에서 보면 2세기까지의 삼한 사회는 널무덤을 주로 사용하였다. 널무덤은 일정한 구역에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무덤의 크기나 입지에서는 서로 차이가 없지만 부장품의 양과 질에서 두드러진 개인 및 지역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따라서 여전히 공동체의 요소가 강하기는 하지만, 집단 내의 상층 세력은 우월한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부산의 널무덤 유적은 기장군의 방곡리 유적(芳谷里芳谷遺蹟)과 금정구 노포동 유적(老圃洞遺蹟),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 등이 있다. 이들 널무덤 중에는 부장품이 거의 없는 경우도 많지만, 방곡리 유적의 가-1호 널무덤의 경우는 청동제 칼자루 장식을 가진 철검(鐵劍)과 납작 도끼, 철창(鐵槍), 도끼 등의 여러 철기 유물과 토기를 부장하고 있어 다른 무덤과 경제력의 차이를 보여 준다.
그러다가 2세기 이후에는 덧널무덤이 등장하는데, 대형 덧널무덤은 구릉의 능선을 중심으로 배타적인 입지를 확보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조성되었고, 소형 무덤은 주변의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노포동 유적의 경우 21호와 31호, 35호 덧널무덤은 유적의 중심 능선을 차지하면서 다른 무덤보다 규모는 물론 철기와 토기 등의 부장품에서도 확연한 양적 차이를 보여 준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정치권력이 세습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고 앞 시기와 달리 토지의 이용에서도 배타적인 우선권이 확보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유적의 규모에서도 집단이나 세력 간의 차이가 더욱 커져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동래 지역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한 시기도 2세기 무렵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한서(漢書)』 지리지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중국 주변의 세력이 두(豆)·변(籩)·조(俎)의 예기(禮器)[제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중국적인 예속이 행해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특히 변진의 혼례·악례(樂禮)·주례(酒禮)·양로(讓路)의 예를 언급하면서 법속(法俗)이 엄준(嚴峻)하다고 특기하고 있다. 이러한 엄격한 예속은 사회적 차별화와 통제의 수단으로도 활용되었고, 특히 매장 의례에서의 후장(厚葬) 풍속은 토기나 철기, 칠기 등 매장 의례에 사용되는 기물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한 상위 계층에게 더욱더 권력의 기반을 집중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