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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05
한자 -栽培
영어의미역 Cultivation of Sweet Potato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인물/단체 조엄|강필리
발생|시작 시기/일시 1763년 10월연표보기 -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구해 부산진으로 보냄
발단 시기/일시 1764년 6월연표보기 -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동래에 보냄
전개 시기/일시 1765년연표보기 - 동래 부사 강필리 고구마 재배 및 보급『감저보(甘藷譜)』 편찬
전개 시기/일시 1813년연표보기 - 김장순(金長淳) 『감저신보(甘藷新譜)』 저술
전개 시기/일시 1835년연표보기 - 서유구가 전라도 지역에 재배 시작, 『종저보(種藷譜)』 간행
발생|시작 장소 부산광역시

[정의]

1763년 통신사 정사인 조엄(趙曮)이 대마도에서 고구마의 종자를 구해 와서 부산에 시배(始培)하고 확대 보급한 일.

[역사적 배경]

조엄통신사의 임무를 띠고 부산을 떠나 대마도 좌수나포(左須奈浦)에 도착하였을 때가 1763년 10월 6일이었다. 대마도에서 자라나는 감저(甘藷)[고구마]를 보고 몇 말의 종자를 구해서 부산진(釜山鎭)으로 보냈다. 다음해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마도에 도착한 것은 6월 13일이었다.

『해사 일기(海槎日記)』 6월 18일 기록에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불리어졌다. 왜음으로 고귀마(古貴麻)라 하는 이것은 산약(山藥)과도 같고 무 뿌리[菁根]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중략]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라고 하여 백성들이 기근을 날 수 있는 좋은 식재료로 생각하고 들여왔다.

일본 가는 길에 고구마 종자를 부산진에 보냈지만 돌아올 때 종자를 또 구해서 동래 교리배(校吏輩)[동래부 아전]에 나누어 주었다. 당시 사행원 중 조엄 외에 서기(書記)인 성대중(成大中)과 김인겸(金仁謙)도 고구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조엄은 여러 사람이 종자를 구했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다 살려서 우리나라에 퍼뜨려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퍼뜨린 것처럼 한다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엄부산진과 동래부에 고구마 종자를 보낸 것은 당시 부산진 첨사인 이응혁(李應爀)과의 인연과 지형적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부산진이 대마도와 토양이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응혁은 조엄의 죽마고우인 이시보(李時甫)의 아들이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고구마 재배가 잘 될지 여부를 몰라 가능한 많이 종자를 가져가서 부산진과 인근의 동래부에도 심어보려고 하였다. 그리고 동래부에서 성공하면 제주도나 다른 지역에도 재배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제주도는 토양이 대마도와 비슷하고, 무엇보다 해마다 겪는 흉년으로 육지에서 곡식을 날라야 하는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엄은 고구마 종자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심는 법, 재배법, 저장법까지 배웠다. 『해사 일기』에는 “심는 법은 봄에 양지 바른 곳에 심었다가 넝쿨이 땅 위로 올라와 조금 자라면 넝쿨의 한두 마디를 가지고 땅에 붙여 흙을 덮어 주면 그 묻힌 곳에서 알이 달리게 되는데, 알의 크기는 그 토질의 맞고 안 맞음에 달렸다.”고 하여 그 재배법을 적어 놓고 겨울에 고구마를 구덩이에 넣어두는 저장법도 함께 알렸다.

[경과]

조엄의 고구마에 대한 관심을 계승한 것이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이다. 강필리는 1764년 8월 부임한 뒤 고구마 종자를 구하고 재배법인 「종식방(種植方)」을 구한 뒤, 동생 강필교(姜必敎)와 함께 1765년 『감저보(甘藷譜)』를 편찬하였다. 강필리고구마 재배에 성공하여 종자를 제주도와 인근 군현까지 두루 나누어 주고 한양 비변사(備邊司)에도 보냈다. 또한 동래 부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올 때 종자를 대량 확보하여 서울로 가져와서 재배를 시작하였다.

강필리고구마 재배에 얼마나 관심을 쏟았는지는 김장순(金長淳)의 『감저신보(甘藷新譜)』[1813]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에는 “고구마 종자는 강씨(姜氏)가 얻어왔고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하였다. 또한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것과 뜻이 같다”라고 하여 조엄이 아니라 강필리가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백성들에게 크게 기여하였다고 적고 있다.

강필리와 함께 고구마 재배에 기여한 사람이 이광려(李匡呂)이다. 이광려는 이미 중국을 통해서 고구마를 수입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통신사가 고구마를 가지고 왔다고 소식을 접하고 7월에 고구마 두 개를 구할 수 있었다. 이광려는 한양에서 고구마 재배를 시도하였는데 여의치 않아 강필리에게 다시 고구마 종자를 부탁하여 새롭게 재배하는 등 고구마 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결과]

강필리·강필교 형제의 『감저보』 이후, 19세기가 되면 김장순의 『감저신보』, 서유구의 『종저보(種藷譜)』, 서경창(徐慶昌)의 『종저방(種藷方)』과 『학포헌집(學圃軒集)』과 작자 미상의 『산림경제 보유(山林經濟補遺)』, 『감저 경장설(甘藷耕藏說)』, 유중임(柳重臨)의 『증보 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등에 고구마 재배법, 재배 및 보급 현황을 알 수 있는 문헌들이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한국에 들어온 외래 작물 가운데 수입한 자와, 수입된 연도가 정확하게 남아 있는 것이 고구마이며, 이 고구마의 시배지가 부산이다. 현재 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는 ‘조내기 마을’이라는 자연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인 조내기가 ‘고구마를 [재배하여] 내었다’라는 뜻이므로 조엄의 고구마를 처음 심었던 곳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또한 조내기 마을에는 잘고 맛이 있는 타박 고구마가 유명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영도에 고구마를 심었다는 문헌 자료가 현재까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조엄이 가지고 온 고구마를 부산진과 동래부에서 심었고, 동래 부사 강필리고구마 재배에 노력하였다는 점으로만 보아도 부산 지역은 고구마 시배지로서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의 말처럼 백성들이 흉년을 이겨내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중요한 구황 작물이 되었다. 현재에도 찜, 구이, 튀김의 중요한 식재료로 사용되며, 한약재로도 사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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