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17 |
---|---|
한자 | 公作米制 |
영어의미역 | System of Gongjakmi gra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성일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동래의 왜관에서 열린 공무역에서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무역품의 대가로 쌀을 지급한 제도.
[제정 경위 및 목적]
본래 조선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지급 결제를 면포로 하여 이를 공목(公木)이라고 불렀다. 조선 정부가 공목의 일부를 1651년(효종 2)부터 공작미(公作米), 즉 쌀로 지급하기로 한 이유는 대마도 측의 요구 때문이었다. 1611년(광해군 3)에 대일 무역이 재개된 뒤 얼마 되지 않은 1620년(광해군 12) 대부터 이미 공목의 미수 누적이 외교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수 누적의 가장 큰 원인은 목화의 흉작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조선이 일본에 지급하는 공목의 품질이 크게 떨어진 것이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처음에는 공목이 8승 40척이었으나, 나중에는 5승 35척까지 떨어졌다. 편의상 1척을 30㎝로 잡고 단순 계산을 하더라도 35척과 40척은 1필에 1.5m씩 차이가 난다. 1동[=50필]이면 75m 차이가 발생하는 셈이다.
연간 무역량이 1,000동이라 가정한다면, 공목 1필의 길이가 40척에서 35척으로 줄어들어 대마도가 입게 되는 손실은 공목의 길이로 75㎞나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마도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마도는 연간 공목의 절반을 쌀로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관련 기록]
『통문관지(通文館志)』[1720]와 『춘관지(春官志)』[1781],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1802], 『봉래 고사(蓬萊故事)』 등에 기록이 전한다.
[내용]
조선 정부는 연간 공무 역량의 3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공목 300동[=1만 5000필]을 ‘1필=12두’ 비율로 환산하여 공작미 1만 2000석을 5년 기한으로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1만 5000필×12두÷15두=1만 2000석]. 그리고 1660년(현종 1)부터는 공목 400동을 공작미 1만 6000석으로 대신 지급하기로 하였다. 공목과 공작미의 교환 비율은 여전히 ‘1필=12두’로 유지하였다.
1811년(순조 11) 신미 통신사(辛未通信使)의 방일(訪日)을 앞두고 펼쳐진 사전 교섭을 통해 조선 정부는 공작미의 교환 비율을 ‘1필=10두’로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1812년(순조 12)부터는 공목 400동의 대가로 공작미 1만 3333석 5두가 일본 측에 지급되었다.
한편 5년 기한이 지날 때마다 대마도는 부산의 왜관으로 사신을 보내 공작미 연한(年限)을 연장하기 위한 교섭을 하였다. 이 사신을 가리켜 공작미 연한 재판(公作米年限裁判)이라 불렀다. 조선 정부는 공목의 일부를 공작미로 바꾸어 지급하는 것은 대마도의 딱한 사정을 가엽게 생각하여 한시적으로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대마도는 조선이 남변(南邊)의 안전을 일본에서 보장받기 위하여 대마도의 쌀 지급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대마도는 공목의 일부를 공작미로 대신 받아가는 것은 정당한 무역 행위이며, 그것을 두 나라 사이의 약조(約條)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 정부는 공작미 지급이 결코 약조가 아니며, 그것은 조선 조정이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내린 한시적인 시혜(施惠)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공목 지급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즉 공작미를 조선은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해마다 은사(恩賜)로 내려 주는 세사미(歲賜米)로 본 반면, 일본은 무역품의 교환 대가로 지급하는 무역미(貿易米) 또는 수입미(輸入米)로 생각하여 둘 사이의 인식에 괴리가 있었다.
[변천]
1650년(효종 1)부터 시작된 공작미 지급은 사실상 개항 이전까지 이어졌다. 1870년(고종 7) 4월 일본 메이지 정부의 외무성 사료를 보면, “일본 측이 2만 필[=400동]의 목면을 1필당 3두 8승[이것은 일본 단위인데, 조선 단위로 환산하면 10.5두]에 상당하는 쌀로 바꾸어 간 것은 굉장한 이윤이었다”라고 높게 평가하면서도 외무성은 그러한 공무역(公貿易)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임진왜란 이후 두 나라가 전개해 왔던 무역 중에서도 공무역과 세견선(歲遣船) 제도를 ‘대마도에 의한 사교(私交)’에 의해 이루어진 ‘잘못된 선례(先例)’라고 보았다. 급기야 1872년(고종 9) 8월 18일에는 텐노[天皇]의 칙지(勅旨) 형태로 ‘세견선 폐지’가 외무경(外務卿)에게 시달되었다. 이로써 공무역도 공작미제(公作米制)도 해체와 소멸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공무역을 통해 부산 왜관을 거쳐 대마도로 들어간 공작미는 대마도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재화(財貨)이었지만, 조선 후기 한·일 관계 속에서 공작미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공작미는 그것을 생산해 납부하는 경상도 농민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작미 지급을 대가로 조선 정부가 일본에서 들여온 구리는 조선의 동전(銅錢) 주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품이었다.
그 밖에 후추[胡椒], 단목(丹木), 물소 뿔[水牛角, 黑角], 명반(明礬) 등 공무역을 통해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온 각종 물품이 조선 사회에서 긴요하게 쓰였다. 이런 점에서 공작미는 조선의 대표 상품인 인삼(人蔘)과 함께 조선 후기 한일 관계에서 외교적 기능과 함께 경제적 기능을 동시에 발휘한 무역품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