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부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부산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고대 국가가 등장한 것은 삼한 시대부터이다. 삼한의 기원은 청동기 시대 후기인 기원전 3세기부터인데,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라는 3개의 정치 집단으로 정립하여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철기 문화가 퍼져 나가기 시작한 기원을 전후해서이다. 삼한 시대 때 부산...
삼한 시대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삼한 시대(三韓時代)[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경]라는 시대 명칭은 주로 문헌 사학(文獻史學)에서 사용되어 왔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 문헌 자료만으로는 삼한 시대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부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 삼한과 관련된 고고학적 발굴 조사 및 연구 성과가 크게 진전되면서 삼한...
-
부산 지역에서 철기를 도구로 만들어 사용한 시대. 우리나라의 철기 시대를 기원전 7~5세기경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기원전 4~3세기부터 신라 토기의 발생과 고총 고분이 출현하는 서기 3세기까지로 본다.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이 본격적인 철기 시대로 진입한 시기는 삼한 시대로 일컬어지는 때부터이다. 즉 기원전 2세기경 위만(衛滿)이 고조선의 권력...
-
고대 부산 및 경상남도 일대에 존재한 정치 집단. 변한(弁韓)은 마한·진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한 정치 집단이었다. 변한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는 사료는 중국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의 도입 부분이다. 그러나 변한·진한 24 소국(小國)의 명칭을 함께 열거할 때는 일일이 변진 모모국(弁辰某某國)이라 하여 진한의 소국과 구별하고 있...
-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던 삼한 시대의 소국(小國).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거칠산국(居漆山國)은 신라에 편입되어 거칠산군(居漆山郡)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동래군(東萊郡)으로 개명되었다. 거칠산국은 일반적으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 전하는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있는데,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
-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던 삼한 시대의 소국. 내산국(萊山國)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동래현은 옛날의 장산국(萇山國) 일명 내산국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동래군은 원래 거칠산국이었는데, 신라에 편입된 뒤 거칠산군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명되었다. 한편, 『대동지지(大東地志)』에...
-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던 삼한 시대 변한의 12국 중 한 나라. 독로국(瀆盧國)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에 변한(弁韓) 12국의 하나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倭)와 경계를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변한 지역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소국임을 알 수 있다. 독로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상남도 거제도설, 부산 동래설, 다대포설 등이 있으나, 현재...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 있던 삼한 시대의 소국.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동래현은 옛날의 장산국(萇山國) 일명 내산국(萊山國)이라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동래군이 원래 거칠산국(居漆山國)이었는데, 신라에 편입된 뒤 거칠산군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개명되었다”라고 한다. 한편, 『대동지지(大東地志)』...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지형, 자연 경관, 기후, 생태계 등 자연 상태. 부산은 한반도의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한다. 동쪽과 남쪽은 동해와 남해에 접해 있고, 서쪽에는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가 형성되어 있다. 동부 지역은 금정산[802m]에서 승학산[496m]을 거쳐 장군산[144m]에 이르는 태백산맥의 마지막 여맥과 장산[634m], 황령산[428m]으로 이어지는 구릉성...
-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서 출토된 삼한 시대의 인골.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삼한 시대의 인골(人骨)은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1번지에 있던 조도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조도[아치섬] 인골은 삼한 시대 전기의 20대 후반~30대 초반 남성 인골로, 움무덤[土壙墓]에서 한 사람의 인골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유물로는 대롱옥[管玉...
-
부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삼한 시대와 삼국 시대의 점을 칠 때 쓰는 뼈. 점뼈[卜骨]는 인간사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기 위해 조각칼 같은 예리한 도구로 동물 뼈를 깎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이 있는 뼈를 말한다. 점뼈로 점을 치는 방식은 동물의 뼈를 지지거나 뼈를 깎아 내면서 뼈의 갈라짐과 같은 양상의 유무 등을 통해 길흉화복을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삼한 시대의 유적과 유물. 부산의 삼한 시대 문화유산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유적으로는 생활 유적과 무덤 유적으로 구분할 수 있고, 시기적으로는 삼한 시대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집터가 확인된 생활 유적으로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의 내성 유적(萊城遺蹟)과 기장군 정관읍의 가동 유적(佳洞遺蹟)이 있다. 내...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서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워 만든 그릇이나 도구. 삼한 시대에는 민무늬 토기 전통의 적갈색 토기와 새로운 기술로 만든 회색의 와질 토기(瓦質土器)가 사용되었다. 적갈색 토기는 노천 가마에서 산화염(酸化焰)으로 구웠는데, 아가리에 삼각형 점토 띠를 붙인 바리 모양 토기가 대표적인 기종(器種)이다. 이러한 토기는 기장군 정관읍 방곡리 유적 가-3호 독무덤[甕棺墓],...
-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의 다양한 생산 활동. 삼한 시대 사람들은 다양한 생산 활동으로 생업을 유지하였다. 삼한 시대에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생산 활동이 많아졌고 생산 활동의 종류도 다양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삼한 시대에 존재하였다고 판단하는 여러 공인(工人) 집단이 식량 생산에서 제외된 전업(專業) 집단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반(半)전업 집단으로 이해하는...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농업과 경작 기술. 철기가 보급된 이후 철제와 나무로 만든 농기구의 발전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 농경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주로 조·기장·보리·밀 등 밭작물을 재배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농기구로는 따비와 곰배 괭이가 있다. 벼는 일부 신석기...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사람들이 물고기나 바다 동물을 잡는 데 사용한 도구. 농경보다는 수렵이나 어로, 채집 활동을 통해 생계 경제를 유지하던 신석기 시대에는 낚시와 작살, 그물 등의 어구를 통해 활발한 어로 활동을 하였다. 이 외에도 통발이나 죽방, 독살 등의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법도 이용되었겠지만,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해안에 밀려온 고래를 잡아먹었던 흔적이 조개더...
-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이 물고기나 바다 동물을 잡은 기술.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는 맨손으로 더듬어 잡는 방법, 창이나 작살을 통해 직접 잡는 방법, 낚시에 미끼를 물려 유인하여 잡는 방법, 단지나 통발 등을 이용하여 잡는 함정 기법, 그물을 이용하여 잡는 방법, 독살이나 죽방렴처럼 시설을 설치하여 잡는 방법 등이 있다. 맨손으로 더듬어 잡는 방법에는 전복이나 조개류, 수초 속...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서 여러 물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 삼한 시대에는 철기(鐵器)가 보급되면서 상당수의 생산 도구가 철제(鐵製)로 변화하였다. 가장 먼저 철제로 바뀐 것은 목공구(木工具)이었고, 이후 농구(農具) 등의 다른 생산 도구도 점차 철제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철제 도구의 종류가 증가하는 현상도 확인된다. 삼한 시대의 목공구로는 쇠도끼[鐵斧]와 쇠...
-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정치체의 풍습 및 사회 질서.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정치체의 구조와 풍습 및 사회 질서는 고고학적 발굴, 그리고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문헌을 통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변진(弁辰)이 12개국으로 되어 있다”라면서 12개국의 이름을 적어...
-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의 가족 구조.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이 혈연과 결혼을 통해 한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최소 단위의 공동체에 대해 알아본다. 삼한 시대의 가족 구성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 때문에 마을 유적의 발굴 결과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전하는 내용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대개 강가나 해안가에서...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 위치한 변한 독로국에서 행해진 신앙. 무형적인 신앙의 존재를 살피는 일은 고고학적으로 쉽지 않다. 현재 알려진 신앙의 대상은 크게 천신(天神), 지신(地神), 산신(山神), 수신(水神), 해신(海神), 조상신(祖上神) 등이 있다. 천신과 관련된 것으로 천군(天君)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천군은 별도의 공간인 소도(蘇塗)를 다스리는 이로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묘제.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무덤은 널무덤과 덧널무덤, 독무덤이 있었다. 부산 지역의 삼한 시대 유적은 매우 빈약하며, 부산광역시 영도구 조도 조개더미 1구 최하층 출토 점토대 토기와 동래구 복천동 내성 유적(萊城遺蹟) 1·2호 주거지, 온천동 민무늬 토기 출토 유적, 금정구 구서동 와질 토기 출토 유적 정도가 알려져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서 행해진 제사.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제사장인 천군과 그가 다스리는 소도(蘇塗)가 기록되어 있다. 삼한에서는 귀신을 믿었는데, 국읍(國邑)에서 한 사람의 천군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국읍에서 거행한 제사 의식을 제천(祭天)이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제천 의식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며 사회 정치적인...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서 전개된 무력 투쟁. 부산 지역의 삼한 시대 전쟁은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는 독로국(瀆盧國), 거칠산국(居漆山國), 장산국(萇山國), 내산국(萊山國) 등의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전(居道傳)에 현재 울산으로 고증되는 우시산국(于尸山國)과...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서 활용한 무기.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무기는 일반적으로 크게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구분한다. 공격용 무기는 다시 원거리 무기, 근거리 무기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원거리 무기로는 활과 화살[弓矢]을 들 수 있으며, 근거리 무기는 철검(鐵劍)·철도(鐵刀)·쇠 투겁창[鐵矛] 등이 있다. 방어용 무기는 갑옷과 투구, 방패가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삼한...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사람들이 의복, 장신구, 신발 등을 통해 몸을 가리거나 외모를 꾸미는 행위의 일체. 삼한 시대의 의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적다. 다만, 단편적인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 삼국 시대의 고분 벽화나 도용(陶俑), 백제 사신이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전...
-
삼한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 삼한 시대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은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삼국지(三國志)』 등의 문헌 기록을 통해 삼한 시대에 벼와 함께 오곡[조와 기장, 콩, 보리, 마]을 주된 곡물로 재배하였고 밤이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와 말, 돼지 등을 사육하였고 술과 떡을 만들어 먹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
-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고대 시대의 취사 용기. 취사 용기(炊事容器)는 취사 시설인 노지(爐址)나 부뚜막에서 사용되는 도구로 주로 토기가 해당된다. 선사 시대의 경우 심발형(深鉢形) 토기가 대표적이며 연질 토기가 등장하면서 시루, 대소형의 옹(甕), 발(鉢) 등으로 점차 다양해진다. 부산 지역에서도 신석기 시대 대표적인 유적인 부산 동삼동 패총과 범방동 패총에서 출...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사람들이 생활한 집과 그에 딸린 부속 시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움집이 만들어졌다. 신석기 시대의 집터는 대체로 원형이나 방형을 띠는데, 길이가 4~8m인 경우가 많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 초기에는 길이가 10m 이상인 대형 집터가 만들어지는데, 경상남도 진주 대평리 유적의 경우 길이 22m, 너비 9.5m에 이르는 대형 집터도 있다....
-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삼한·삼국 시대 부뚜막과 구들. 선사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 형태의 노지(爐址)가 발달하여 삼한 시대 이후부터 생활 유적에서 부뚜막이 등장한다. 부뚜막은 토기를 아래에서 받치는 지각(支脚)이 있어 이전 노지의 형태보다 조리할 때 불에서 토기로의 열전도율이 높았다. 지각은 돌이나 깨진 토기 조각 등을 이용하였다. 기장군 가동 유적에서 길이...
-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선사~조선 시대의 취사 시설. 취사 시설(炊事施設)은 인간의 식생활을 위한 음식 재료의 가공 및 조리 등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 및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시설을 말한다. 취사 시설은 선사 시대의 노지(爐址)와 삼한 시대에 등장하는 부뚜막을 비롯하여 이동식 부뚜막이 있다. 노지는 취사·난방·제습·조명 등의 기능을 겸하는 시설로, 신석기 시대 부산 동...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집단이 다른 집단과 물품이나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은 행동이나 반응. 기원 후 3세기 무렵에 기록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변한과 진한을 합쳐 24개의 국(國)이 형성되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국은 규모에 차이가 있지만, 대개 현재의 군(郡)이나 분지를 단위로 하는 지역 정치체(政治體)라고 할 수 있다. 이들...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해양 교류. 부산 지역에서 해양 교류를 행한 증거로 조도 조개더미, 동래 내성, 온천동, 노포동 등지에서 야요이[彌生]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특히 내성 유적에서는 철기의 가공과 관련된 유구(遺構)에서 야요이 토기가 출토되어 왜인들이 철기를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부산 지역에 일정 기간 정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부산...
-
삼한 시대 부산 독로국과 김해 구야국의 문화 공유와 금관가야 연맹 형성 관계. 한(韓)으로 총칭되는 삼한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며, 한반도 남부에서 국(國)이 발생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진한·변한은 삼한 시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정치체(政治體)의 총칭으로 앞 시기의 청동기 사회를 토대로 중국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점토대 토기 문화, 다뉴경(多鈕鏡) 같은 청동기...
-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정치 세력과 낙랑 군현과의 교류. 기원전 108년 한(漢)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평양 일대에 세운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정치·경제적 거점 구실을 하였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변한과 진한도 낙랑을 통해 한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발달된 철기를 수출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영남 지역에서 한식 유물(漢式遺物...
-
삼한 시대 변한·진한과 중국 동북 지역 북방 민족과의 교류. 삼한 시대의 변한·진한의 각 집단은 주변 집단과 활발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특히 지금의 중국 동북 지역인 랴오닝 성[遼寧省]과 지린 성[吉林省] 일대의 북방 민족과도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다. 현재 낙동강 하류 지역에 삼한의 국(國)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지역에 청동기 문화가 쇠퇴하고 철기 문화...
-
삼한 시대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의 교류 현황. 변한은 철 생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부한 철을 매개로 중국의 한나라·낙랑군·대방군과 동예·마한·일본 열도의 왜 등 동아시아와 국제 교역을 행하였다. 일본 열도에서는 아직 철을 생산하지 못하였으므로, 변한 중에서도 부산의 독로국과의 교류는 매우 중요하였다. 흑요석(黑曜石)에서 알 수 있듯이,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의...
삼국 시대
-
고구려·백제·신라 및 가야가 병립하였던 시기의 부산의 역사와 문화. 삼국 시대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마한·변한·진한 등 삼한 시대 정치체를 계승한 백제·신라·가야가 고대 국가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는 3세기경부터 668년 삼국이 통일되는 시기까지를 말한다. 삼국 및 가야 이외에 부여나 옥저, 동예 등 여러 정치체가 공존한 시기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만...
-
초기 국가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부산 및 경상남도 일대에 존재한 나라. 가야(伽倻)는 국명이지만 가야가 존재하였던 당시의 이름은 아니다. 당시의 국명은 가라이었다. 가라가 어느 순간부터 가야로 고쳐져 불렸다. 그리고 한 나라 또는 두 나라만을 지칭하는 국명이었으나, 여러 나라 전체를 통칭하기도 하였다. 가야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면 사서(史書)마다 차이를 보인다. 또한...
-
삼국 시대 부산 및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 발전한 가야의 한 소국. 금관가야(金官加耶)는 ‘9간 사회(九干社會)’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의 기반 위에 성립하여, ‘수로왕(首露王)’으로 상징되는 철기 문화를 소유하고 이른바 ‘전기 가야’의 맹주 국가로서 부산의 독로국[혹은 거칠산국]을 비롯한 여러 가야 소국을 통솔하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문헌 사료를 통하여 금관가야는...
-
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인골. 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 시대의 인골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와 22호에서 출토된 인골들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골들은 5세기 중엽 금관가야 지배자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竪穴式石槨墓)]에 주인과 함께 묻힌 순장자들의 것으로 모두 20세 이상의 남녀 성인 인골들이다. 발굴 당시에 부식이 심하여 단...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유산. 삼국 시대 문화유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묘는 구릉에 수십 기 또는 수백 기가 무리를 이루어 분포한다. 분묘 유적의 예로는 부산 복천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반여동 고분군, 부산 오륜대 고분군, 두구동 고분군, 덕천동 고분군, 당감동 고분군, 괴정동 고분군, 미음동 고분군, 미음동·구랑동 고분군, 생곡동 가달 고분군, 좌동 고분군, 송정동 고분...
-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삼국 시대의 흙그릇.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삼국 시대의 그릇류는 대개 흙으로 빚어 만든 토기류가 대부분이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기(木器)류도 사용되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삼국 시대가 되면 토기 가마가 발달함에 따라 평요(平窯)에서 등요(登窯)로 개량되어 소성 온도가 높아져 비교적 단단한 토기가 생산되었다. 도자...
-
부산 지역에 살았던 삼국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생산 활동. 삼한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해진 생산 활동은 삼국 시대에 그 종류가 더 많아졌다. 그러나 삼국 시대의 백성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고 여러 종류의 수공업을 담당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삼국 시대의 수공업은 공방(工房)[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곳]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삼국 시대에는 토기 공방과 기...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농업 기술. 삼국 시대의 농경 기술은 당시의 농구(農具)와 경작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삼국 시대가 되면 전용(專用) 철제(鐵製) 농구[농경 작업에만 사용하는 철제 도구]가 출현하고 축력(畜力)이 도입되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또한 경작지에서는 구획 단위가 넓어짐과 동시에 논밭을 전환하여 경작하였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에는 새로운 도구와 농사법을...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았던 도구.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문헌 기록을 통해 삼국 시대에 물고기 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과 원시적인 정치 어구(定置漁具)[일정한 장소에 고정해 놓은 물고기 잡이 장치]를 사용하였다는 점, 백제에서는 해산물이 비단과 함께 중요한 교역 품목이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기...
-
삼국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물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 삼국 시대에는 수공업이 발달하여 여러 종류의 공방(工房)[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곳]에서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다.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공방으로는 토기 공방과 기와 공방, 철기 공방, 귀금속 공방 등이 있다. 토기 공방에서는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토기를 비롯하여 무덤에 부장(副葬)하는 다양한 토기를 생산하였다...
-
삼국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의 생활 형태와 사회 구조. 일반적으로 기원후 4세기부터 7세기 중엽까지 만주와 한반도에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를 건설해 서로 경계를 접하며 대립 경쟁하던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한다. 부산 지역은 초기에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었다가 후에 가야 연맹체에 포함되었다. 그 후 신라의 팽창으로 부산 지역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독로국...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 행해졌던 다양한 신앙. 삼국 시대의 신앙 양상은 고유 신앙이 행해진 시기와 불교가 수용된 시기로 나누어진다. 먼저 고유 신앙의 대상은 크게 천신(天神)·지신(地神)·산신(山神)·수신(水神)·해신(海神)·조상신(祖上神) 등이 있었다. 1. 천신 천신 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 21호의 부곽인 22호분에서 출토된 칠두령(七頭鈴)을 들 수 있는데,...
-
신라 영토로 편입된 이후, 부산 지역에 형성된 삼국 시대의 불교 문화. 부산의 삼국 시대 불교 문화는 다른 지역에 비한다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부산 지역에 사찰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점에서 그러하다. 조선 전기의 자료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 23 동래현 불우조에 의하면 금정산에 범어사(梵魚寺)와 효의사(曉義寺)가...
-
부산 지역에 있는 삼국 시대의 무덤. 현재까지 부산 지역에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거나 조사된 유적 중 가장 많은 것이 분묘 유적이고, 무덤의 종류도 다양하다. 지금까지 조사된 삼국 시대 고분군의 묘제는 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 독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움무덤이다. 덧널무덤이 주요한 묘제로 사용된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까지 부산...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 행해진 조상 숭배 모습. 인류가 망자를 위해 무덤을 만든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무덤이라는 확실한 형태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원시인들은 인간의 생명도 봄이 되면 되살아나는 자연계의 생명처럼 부활하기를 열망하고 믿었다. 그들은 생명이 다한 조상들도 사후 세계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영생한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를...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정치 집단 상호 간의 무력 투쟁. 삼국 시대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 각국들 간의 전쟁은 영역의 확장 또는 갈등의 해소를 위해 전쟁을 행하였다.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서의 대표적 전쟁은 400년 고구려군 남정에 의한 당시 부산과 김해 지역에 걸쳐 존재하였던 금관가야[남가라]와 고구...
-
삼국 시대에 왜(倭)가 부산 지역을 침입해 온 사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 때부터 왜의 침입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5세기 대에는 17차례에 걸쳐서 왜가 침입해왔다. 심지어 경주 지역의 명활성, 금성, 월성을 공격하거나 포위하는 일도 있었고, 실성왕(實聖王) 대에는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에 인질로 보내기도 하고 또 왜인(倭人)이...
-
부산 일대의 삼국 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 삼국 시대는 이전의 삼한 시대 이래 수평적인 사회 구조를 지속하던 각 지역 집단이 주변의 지역 사회를 통합하거나 집단 간의 연합을 이루면서 계급적 지배 질서를 바탕으로 한 수직적인 사회로 재편성되어 고대 국가의 기틀을 갖춘 시기이다. 이러한 변화에 편승하여 삼국 시대에는 앞 시기에 볼 수 없던 여러 문물이 등장하였는데,...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 있었던 방어 시설과 방어 체계.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의하면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때[57~79년]에 거도(居道)가 우시산국(于尸山國)[울산]과 거칠산국(居柒山國)[동래]을 쳐서 빼앗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군(居柒山郡)으로 장산국(萇山國) 또는 내산국(萊山國)이었는데, 신라가 이를 취하여 거칠산군을 두었다고 한...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 있었던 방어 시설과 행정 체계. 삼한 시대에 북쪽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성장하는 한편, 남쪽에서는 삼한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부산 지역의 독자적인 정치체를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독로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동래와 거제도 두 지역이 거론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거칠산국(居柒山國), 내산국(萊山國), 장산...
-
신라와 통일 신라 시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에 설치된 지방 통치 구역.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전제 정치 확립을 위한 왕권 강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문무왕은 진골 귀족 세력에 대한 군사적 기반을 박탈하고, 관료적인 질서를 확립하였다. 이후 신문왕은 전제 정치를 뒷받침하는 정치 및 군사 등과 같은 제도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대당(大唐) 외교...
-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마구와 장신구를 통해 살펴보는 삼국 시대의 기승 문화. 고대 사회에서 말의 가축화가 인류의 활동 폭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말이 지닌 뛰어난 기동성을 이용하여 지역 집단 간의 정보 교류를 촉진시키고 군사적 목적으로도 자주 이용되어 결과적으로 사회 체제의 확립이나 통폐합을 이끌어내는 데 말이 유용하게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
-
삼국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의 의복 문화 생활. 부산 지역에 살았던 삼국 시대 사람들이 어떠한 옷을 입고 생활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일부 고고학적 자료와 삼국의 일반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사회는 지배층과 일반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신분 차이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옷을 입었다. 타이완[臺...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물. 삼국 시대에는 향상된 농경 생산력을 바탕으로 음식 문화가 발달하였다고 알려졌는데, 삼국 시대 음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문헌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의 문헌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작물을 재배하였는데, 특히 많이 재배한 것은 콩과 보리 같은 밭작물이었다. 그러나...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주거 형태. 부산 지역 삼국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마을이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그 대표적 유적이 강서구 지사동의 지사 과학 단지 조성 지대에서 확인된 지사동 유적, 정관 신도시 건설 사업에 수반해서 조사된 가동 유적, 부산~울산 간 고속도로 개설에 앞서 조사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
삼국 시대 부산 지역과 다른 지역 혹은 국가와의 인적·물적 교류. 부산 지역은 한반도 동남쪽 바다와 면해 있고,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 예로부터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동쪽으로는 바다 건너 일본과 교류하였고, 서쪽으로는 가야연맹체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특히 낙동강 수로를 통한 가야·신라와의...
-
삼국 시대 해양을 통해 부산 지역과 여타 지역 사이에 이루어진 교류. 한반도 동남쪽 바다에 인접한 부산은 일찍부터 해양을 통해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지금의 김해 지방에 있던 구야국(狗邪國)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할 때 반드시 거치는 해로상의 요지였다고 한다. 김해 지방이 고대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 사이에 이루어진 삼국 시대의 각종 교류. 4세기 이후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낙랑군의 멸망[313년], 왜의 신라 공격,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의 남정, 가라국[가락국]의 쇠퇴와 대가라국의 흥기, 562년까지 가야 여러 나라의 멸망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인 변동 속에서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의 관계도 규정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즉 4세기...
-
삼국 시대 부산 지역의 중심 문화 이동과 중심 세력 집단의 변화. 고대 부산 지역의 중심 세력이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축조 세력으로부터 연산동 고분군 축조 세력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1. 부산 복천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의 구릉 위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의 동래 중심가 북쪽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
-
5세기 중엽 전후, 가야 문화에서 신라 문화로의 부산 지역의 문화 변동. 4세기 대 부산 복천동 고분군을 필두로 한 부산 지역의 독로국(瀆盧國)은 인접한 김해 지역과 더불어 전기 가야 연맹인 금관가야의 맹주국으로 부상하였다. 낙동강과 수영강과 같은 내륙 연결 통로와 바다가 접하는 지리적 여건을 통해 선진 문물의 유입이 수월하였고 무역항으로서 물산 집하지(集荷地)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
7세기 중엽 신라 통일부터 10세기 초반 멸망 때까지 부산의 역사. 삼국을 통일한 676년 이후부터 멸망할 때까지 부산의 행정 조직과 통치 구조, 사상과 신앙 활동, 대외 교류, 문화 및 명소 등에 살펴본다. 오늘날 부산 지역은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 대에 삽량주[양산] 소속의 거칠산군(居柒山郡)으로, 대증현(大甑縣)과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이라는 두 개의 현을 영속한 행정 구역이...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유산.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문화유산으로는 성곽·사찰·생산 시설·제사 유적·마을·무덤 등의 유적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이 알려져 있다. 사찰로는 범어사와 장안사, 선여사가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석탑·부도·석등 등 석조물 일부만 현존하고, 이외의 것은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통일 신라 시대의 석조물로는 범어사 삼층 석탑...
-
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통일 신라 시대의 토기. 부산 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통일 신라의 토기가 상당수 출토되었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 동래군의 치소였던 동래 고읍성 터와 의 거점 취락의 하나로 추정되는 고촌리 유적에서 많은 수량의 통일 신라 토기가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연제구 연산동과 수영구 망미동에 걸쳐 있는 배산성지(盃山城址), 동래읍성지, 고촌...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일거리. 동래군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업은 농업이었으며, 해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절영도에서 명마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말을 사육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일반 백성들이 먹고살기 위한 생업으로 가장 일반적인 일은 땅을 갈아먹고...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농업 기술. 통일 신라 시대의 농업 기술은 크게 논농사와 밭농사의 경지 이용 방식과 농기구, 수리 시설 등 다양한 부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어 아직 견해가 통일된 상태는 아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논농사는 매년 농사를 짓는 상경 연작 농법 단계로 보는 입장과 한해 농사를 짓고 다음해 쉬는 휴한 농법 단계로 보는 입장으로...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서 물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 통일 신라 시대에는 안정된 사회 분위기와 귀족 문화가 형성되면서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생산 도구도 더욱 다양해졌다. 그러나 통일 신라 시대의 생산 도구가 삼국 시대와 완전히 달랐던 것은 아니고, 삼국 시대의 생산 도구를 계승하면서 용도에 따라 세분되거나 개량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면...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사회 구조. 통일 신라 시대의 사회 구조는 기본적으로 전제 왕권을 바탕으로 골품제에 기초한 신분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 사회는 영토 확대와 인구 증대로 인해 통일 이전과는 달리 골품제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즉 성골이 사라지고, 1두품에서 3두품의 두품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고 이들은 일반 백성과 비슷한 처지로 변화하였다....
-
통일 신라 시대 말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지방 세력. 호족(豪族)은 통일 신라 말기에 지방 사회에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일정한 지역에 대해 행정·경제·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말한다. 당시 동래 지역에 있었던 호족 세력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다만 김해의 일부가 현재 부산의 행정권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이를 지역적으로 확대하여 본다면...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 사람들의 신앙. 통일 신라 시대 신앙의 중심은 불교였으며, 불교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 부산 지역에도 범어사(梵魚寺)를 중심으로 신앙 활동이 활발하였다. 범어사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신라의 화엄종 10개 사찰 중 하나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화엄 10찰 가운데 하나로 ‘금정 범어’를 들고 있다. 범어사는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추진...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범어사를 포함하는 통일 신라의 화엄 십찰. 신라 시대 의상(義湘)과 그의 제자들이 창건하여 화엄 사상을 널리 전파한 10곳의 화엄종 사원으로, 부산의 범어사를 포함하여 화엄사(華嚴寺), 부석사(浮石寺), 해인사(海印寺), 갑사(岬寺), 옥천사(玉泉寺), 보원사(普願寺), 미리사(美理寺), 보광사(普光寺), 청담사(淸潭寺)를 지칭하나 다른...
-
부산 지역에 있었던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 지금까지 조사된 부산 지역의 통일 신라 시대 무덤으로는 덕천동 고분군, 노포동 작장 고분군, 부산 오륜대 고분, 반여동 고분군, 청강리 고분군, 교리 유적, 명례리 고분군, 기장 월드컵빌리지 조성 지역의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등이 있다. 덕천동 고분군과 청강리 고분군은 6세기의 삼국 시대부터 조영된 고분군으로서 통일 신라 시...
-
부산에서 확인된 통일 신라 시대의 각종 제사 의례.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장례 의례와 국가 의례의 일부로서 산천 등 자연에 대한 제사 의례가 부산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들어서 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를 비롯하여 귀족과 일반인들도 화장을 하는 사례가 증가하였다. 화장한 후에는 골호(骨壺)에 넣어 매장하는 장골(藏骨), 강이나 산에 뼈를 뿌리...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 있던 온천 휴양과 요양의 양태. 통일 신라 시대 때 부산 지역은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와 해운대, 태종대와 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수려한 자연 경관, 그리고 각종 질병의 치료에 효험이 있는 동래 온천과 해운대 온천 등이 있어서 요양과 휴식이 가능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무열왕(武烈王)은 태종대를 찾아 활쏘기를 즐겼으며,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말에...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서 발생하거나 부산과 관련하여 일어난 각종 전쟁. 삼국 성립 이후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삼국 간에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다가 7세기 중엽에 당(唐)과 연합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당과 전쟁을 치렀으나, 676년(문무왕 16) 신라는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 있었던 방어 시설과 행정 체제. 통일 신라 시대 부산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인물과 설화로 전하는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당시 부산의 위상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5세기 후반부터 왜(倭)가 신라의 변경인 부산 지역으로 침입하자 기장에 임해진(臨海鎭), 낙동강 하구에 장봉진(長峯鎭)을 설치하였다는 것과 태종 무열왕(太宗...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 있었던 성곽과 지방 행정 체제. 통일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기존의 통치 체제에서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앙 집권적인 체제로 정비하는 주군현제(州郡縣制)를 실시하였다. 이에 수도 경주는 6부 55리 260방으로, 지방은 주·군·현으로 편제하여 전국에 9주(州) 5소경(小京) 117군(郡) 293현(縣)을...
-
통일 신라 시대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원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갑화량곡(甲火良谷)이란 이름은 동래의 지명 변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동래군은 757년(경덕왕 16) 이전에는 거칠산군(居柒山郡)이었는데, 거칠산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거친 뫼’ 즉 황령산을 끼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갑화량곡도 우리말을 한자음화한 이두식 지명...
-
통일 신라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과 영도구 일대에 있던 지방 통치 구역.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지방 제도를 개편하였다. 특히 경덕왕은 전제 왕권 강화를 위해 종래의 중앙 관제와 지방 제도 명칭을 한자로 고쳤다. 이때 동래군의 영현(領縣)이던 대증현도 한자로 개명되어 동평현(東平縣)이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지리...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과 인근 지역 간의 교류 활동. 통일 신라 시대 신문왕(神文王) 대에 삽량주[지금의 양산] 소속의 거칠산군(居漆山郡)은 대증현(大甑縣)과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을 영현(領縣)으로 두었다. 이후 경덕왕(景德王) 대에는 이러한 군현 지배 관계를 유지한 채 양주(良州)에서 동래군(東萊郡)으로, 동래군에서 기장현(機張縣)과 동평현(東平縣)으로 고을 명칭만 한자식으...
-
통일 신라 시대 때 해양을 이용한 부산과 중국과의 교류. 한반도 동남쪽 바다에 인접한 부산은 일찍부터 해양을 통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왜인전(倭人傳)’에 따르면, 지금의 김해 지역에 있던 구야국(狗邪國)은 중국과 일본을 왕래할 때 반드시 거치는 바닷길의 요지였다고 한다. 김해 지역이 고대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
-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바다를 통한 문물 교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은 수도 경주의 외항인 울산을 통해 당(唐) 및 일본과의 해양 교류를 전개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먼저 통일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는 150여 회에 걸쳐 있었다. 주요 교통로는 당항성에서 가는 항로였으므로, 부산 지역을 경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시기 부산 지역을 경유하는 해양 교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