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통일 신라 시대의 농경 기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203
한자 統一新羅時代-農耕技術
영어의미역 Agricultural Techniques of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김기섭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의 농업 기술.

[개설]

통일 신라 시대의 농업 기술은 크게 논농사와 밭농사의 경지 이용 방식과 농기구, 수리 시설 등 다양한 부분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어 아직 견해가 통일된 상태는 아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논농사는 매년 농사를 짓는 상경 연작 농법 단계로 보는 입장과 한해 농사를 짓고 다음해 쉬는 휴한 농법 단계로 보는 입장으로 나뉘어 있다. 밭농사는 기본적으로 1년 1작으로 보는 편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농업 기술]

통일 신라 시대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축력(畜力)을 이용한 철제 농기구 사용이 보다 확대되어 삼국 시대보다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특히 철제 보습 사용이 더욱 확대되어 깊이갈이가 이루어짐으로써 지력의 한계를 극복하였고, 이를 통해 이전 시기보다 경지 이용도를 더욱 높여 나갔다. 볏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유볏리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한다. 경주 안압지에서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호미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제초 용구인 호미가 사용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농업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료로 「개선사 석등기(開仙寺石燈記)」를 들 수 있다. 이 자료에 보이는 ‘저답(渚畓)’과 ‘오답(奧畓)’은 논의 위치에 따른 표현인 것으로 추정된다. 저답은 하천에 가까이 있는 논, 오답은 하천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논이라고 본다. 당시의 논은 대체로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작은 규모일 것이며, 이는 논을 수평으로 만드는 기술 수준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밭은 고랑과 이랑으로 이루어진 경작 구획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 이전 경기도 하남시의 미사리 밭 유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4~6세기 백제와 신라 때 벽골지(碧骨池) 시제(矢堤) 등 수리 관개 시설이 축조되었다. 이러한 수리 시설의 확충은 이후 통일 신라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는 이 시기의 농업 생산에도 유용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토오다이지[東大寺]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 문서(新羅村落文書)」에 따르면, 논과 밭 외에 삼베[麻]를 심는 마전과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을 심도록 하여 주곡 작물 외에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도록 하였다. 이들 작물들은 국가의 수세 대상이 되거나 의복 생활에 필요한 삼베와 명주를 생산하는 재료가 되었다. 잣과 호두는 약용으로 쓰였거나 조공품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통일 신라에서는 다양한 채소류, 양념류도 재배되었을 것인데, 오이·참외·상치·마늘·생강 등이 보인다.

[부산 지역의 농업 기술]

부산 지역의 농업 기술도 기본적으로 통일 신라 시대의 농업 기술을 바탕으로 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부산은 통일 신라 시대의 동래군·동평현·기장현에 해당한다. 당시 동래군은 영현(領縣)이었던 동평현과 기장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해안이나 저습지보다는 계류를 이용하는 산 곡간의 토지에서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래군금정산을 중심으로, 동평현백양산을 중심으로 흘러나오는 계류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