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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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韓時代-衣生活 |
영어의미역 | Dress Patterns of the Three Han State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이재현 |
[정의]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사람들이 의복, 장신구, 신발 등을 통해 몸을 가리거나 외모를 꾸미는 행위의 일체.
[개설]
삼한 시대의 의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매우 적다. 다만, 단편적인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 삼국 시대의 고분 벽화나 도용(陶俑), 백제 사신이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는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도포(道袍)를 입었으며, 혁교답(革蹻蹋)[가죽신]을 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후한서(後漢書)』에는 짚신[草履]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였다. 의책(衣幘)[옷과 모자]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가 군에 조알할 때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자신의 의책과 인수를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인(千餘人)이나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변진전에는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다. 의복은 청결하고 장발로 다니며, 폭이 넓고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라고 하였으며 변한 포를 낙랑에 바친 기록도 있다.
[부산 지역의 의생활]
문헌 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삼한 시대에는 모시나 삼베뿐만 아니라 비단도 옷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옷의 형태는 도포를 입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인물의 복장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저고리 형태의 길이가 긴 도포를 걸치고, 여자들은 바지 위에 치마를 입고 두루마기를 걸친 형태일 것으로 생각된다. 머리는 장발도 있지만 상투가 기본이었으며,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의 목관묘에서 철대(鐵帶)가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관모 형태의 모자를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
또한 상위 계층에서는 중국의 의책을 수입하여 사용하거나 모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과 중국산 허리띠 장식품이 창원 다호리 유적(昌原茶戶里遺蹟)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신발은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가동 유적(佳洞遺蹟)에서 왜나막신[게다] 모양의 나막신이 출토되었는데, 문헌 기록의 혁교답으로 추정된다. 또 4~5세기 무렵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단화 모양의 그릇 받침[器臺] 장식품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에서 짚신 형태의 토기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가죽으로 된 단화와 짚신이 삼한 시대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