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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의 일본 열도와의 교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232
한자 三國時代-日本列島와-交流
영어의미역 Exchanges with the Japanese Archipelago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근우

[정의]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 사이에 이루어진 삼국 시대의 각종 교류.

[개설]

4세기 이후의 중요한 사건으로는 낙랑군의 멸망[313년], 왜의 신라 공격,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의 남정, 가라국[가락국]의 쇠퇴와 대가라국의 흥기, 562년까지 가야 여러 나라의 멸망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인 변동 속에서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의 관계도 규정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즉 4세기는 주로 김해의 가라국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5세기 중엽 이후는 신라 문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 점에서 신라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 열도와의 관계도 달라졌다. 따라서 삼국 시대 부산 지역과 일본 열도의 관계는 김해의 가라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시기와 신라가 진출한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4세기 일본 열도와의 교류]

먼저 김해 가라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시기의 일본 열도와의 교류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산 지역의 중심 고분인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일본 열도 계통의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적갈색 연질 토기들이다. 목 항아리, 작은 항아리 받침대, 손잡이 달린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이 있으며 표면을 깨끗하게 문질러 매끄러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들 토기는 일본 열도에서 건너온 것도 일부 있지만, 재지 토기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되거나 재지 공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대표적으로 토기의 표면을 물 손질을 하거나 격자 타날 혹은 평행 타날한 흔적이 보이는 대신 내부는 깎기 조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의 하지키[土師器]와는 다른 점이다. 또한 하지키는 일본에서는 고분 내부 시설에 부장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일상생활에 조리 도구로 사용되는 항아리도 부산 등 영남 지역에서는 고분에 부장되고 있다.

부산 지역에서 하지키계 토기가 출현하는 것은 부산 동래 패총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3세기 중반으로 보인다. 이는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것처럼 변진에서 생산되는 철을 입수하기 위하여 왜인들이 한반도를 빈번하게 왕래하거나 체재하게 된 결과로 추측된다. 하지키계 토기가 단야 유구 혹은 단야와 관련된 유물이 확인된 유적에서 출토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무렵 한반도에서는 낙랑의 쇠퇴와 멸망으로 새로운 철의 판로를 개척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철기의 주요 수출처가 낙랑 대신 일본 열도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열도의 상황을 보면 이 시기는 정형화된 전방후원분이 출현하는 시기이고 이 고분에는 다량의 철제 무기와 농공구 등이 부장된다. 즉 일본 열도에서도 철기의 수요가 급증한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부산을 포함한 영남 지역에서 하지키계 토기가 출현하는 상황은 당시 한반도 및 일본 열도의 조건과 부합된다.

[5세기 일본 열도와의 교류]

신라가 부산 지역에 진출한 시기의 일본 열도와의 교류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본 열도의 왜는 가야와 달리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5세기 전반까지 왜는 신라의 수도권 부근을 침공하였으나, 신라의 수도권 방어 체계가 확립된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신라의 변경 지역인 동남해안의 부산 지역을 침공하였다. 왜는 대마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였다. 463년[신라 자비왕 6]에 왜는 삽량성(歃良城)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신라 변경인 동남해안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되었다. 특히 신라는 493년(소지왕 15)에 부산 지역에 임해진[기장 지역], 장령진[낙동강 하구 지역]을 설치하여 왜에 대비하였고 500년에는 장봉진이 함락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왜가 신라의 변경 가운데 부산 지역을 주로 침공하였던 사실을 방증한다.

가야 시기의 부산 지역은 왜와 친선 관계에 있어 긴밀한 교역이 이루어졌으나, 신라의 세력 아래에 들어간 이후에 왜는 부산 지역의 세력과 적대 관계로 급변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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