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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85
한자 三國時代-住居
영어의미역 Dwelling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홍보식

[정의]

삼국 시대 부산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주거 형태.

[개설]

부산 지역 삼국 시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마을이 조사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그 대표적 유적이 강서구 지사동의 지사 과학 단지 조성 지대에서 확인된 지사동 유적, 정관 신도시 건설 사업에 수반해서 조사된 가동 유적, 부산~울산 간 고속도로 개설에 앞서 조사된 기장군 기장읍 청강리 유적 주거지, 대라리 취락 유적, 기장군 일광면 월드컵빌리지 조성 공사에 앞서 조사한 유적 등이다.

[지사동 유적의 주거 형태]

지사동 유적은 삼국 시대의 주거지군과 분묘군·제철 유구군, 고려~조선 시대의 건물지와 제철 유구가 확인되었다. 삼국 시대의 주거지군은 능선 말단부의 충적 대지에 위치하며, 50여기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말각방형·장방형·원형 등 다양하고, 대부분의 주거지 내부에 소토가 채워져 있었다. 주거지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로 볼 때, 지사동 삼국 시대 마을은 4~5세기 대에 조성되었다. 주거지군에서 동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주거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분군이 위치한다. 주거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된다.

[가동 유적의 주거 형태]

가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주거지 5동, 삼국 시대 주거지 160동, 굴립주 건물지 86동, 폐기유구·하도·분묘 15기 등 266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삼국 시대의 수혈 주거지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방형·타원형·원형·부정형 등 다양한데, 방형이 다수를 차지한다. 주거지는 반지상식 가옥으로 규모는 길이 600㎝~800㎝, 깊이 10㎝~50㎝이고, 면적은 14.3㎡~42.7㎡로 주거지 간의 편차가 심하다. 주거지 바닥은 대부분 1㎝~2㎝ 두께로 적갈색 사질토 또는 점토를 깔아 다졌거나 ‘불다짐’하였다. 벽은 수혈에서 안쪽으로 약 30㎝~40㎝ 정도 흙을 채워 넣은 다음 판재나 각목 등의 목재로 뼈대를 만들고, 뼈대 안쪽 면에 10㎝~15㎝ 두께로 점토를 덧발랐다.

주거지 벽을 따라 너비 40~60㎝, 깊이 10㎝의 도랑을 파 벽구를 만들고, 그 안에 직경 20㎝, 깊이 20~30㎝의 작은 기둥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쪽 벽에 치우쳐서 점토로 아궁이를 설치하였고, 북쪽 벽을 따라 구들이 설치되었다. 부뚜막은 불을 피우는 아궁이와 솥걸이를 비롯하여 길이 15㎝ 내외의 길쭉한 돌 1매를 세워 솥 받침으로 사용하였다. 솥 받침을 사용한 것은 부뚜막이 솥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궁이 바닥에 돌을 놓고 그 위에 솥 바닥을 닿게 하였다. 아궁이에서 ‘ㄱ’자 식으로 꺾여 연결된 구들은 너비 20㎝, 길이 400㎝이다. 아궁이에서 구들을 꺾이게 한 것은 연기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의 구들은 요즘의 온돌과 달리 바닥을 데우지 않고 복사열을 이용하여 주거지 내부 공기를 따뜻하게 하는 페치카와 같은 원리이다.

일부 주거지는 증개축의 흔적도 확인되어 주거 사용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들 수혈 주거지 내부에는 부뚜막이 있는 온돌 시설과 부뚜막 가까이에서 시루와 장동옹 등이 출토되었고, 일부는 부뚜막에서 지각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삼국 시대 주거의 내부 구조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주거지 간에 중복이 많이 되었는데, 출토 유물의 분석과 더불어 주거지의 구조 변천을 해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굴립주 건물지는 4주·6주·9주 등과 규모가 아주 큰 굴립주 건물지 등 다양하다. 굴립주 건물들 중 일부에서 상태가 양호한 목제 기둥 하부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기둥 아래에 돌 또는 목재를 받친 예도 확인되었다. 이들 굴립주 건물지에서 확인된 목재 기둥을 통해 삼국 시대의 굴립주 건물의 복원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청강리 유적 주거지·대라리 취락 유적의 주거 형태]

마을은 3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가구 수가 증가하면서 4~6세기에 최대를 이루었다가 7세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였다. 청강리 유적 주거지·대라리 취락 유적은 4개의 구릉으로 구분되는데, 남쪽의 Ⅰ지구에는 4~5세기 대의 덧널무덤과 구덩식 돌방무덤 등의 고분군이고, Ⅱ지구는 고분군과 제사 유구가 위치하고, Ⅱ지구의 북쪽에 있는 Ⅲ지구 전체와 Ⅳ지구의 일부에는 수혈 주거지, 고상 건물지, 저장공, 용도 불명의 수혈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유구가 집중되고, 가장 북쪽의 Ⅳ지구 정상부 주위에 4중의 목책 시설로 된 제사 유구가 위치하고 있다.

이들 4개 지구의 구릉에 조영된 유구들은 4~5세기 대의 한정된 시기의 복합 유적으로서 이 시기의 대라리 취락 유적을 남긴 집단의 일상생활과 저장, 그리고 제사와 분묘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당시의 생활사 전체를 복원할 수 있는 최적의 모델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기장군 월드컵빌리지 조성 지역의 주거지 유적]

기장군 월드컵빌리지 조성 지역에서도 삼국 시대의 주거지가 다수 조사되었다. 조사는 되지 않았지만, 마을 유적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부산 동래 패총은 현재 약 726㎡[220평]만 사적 제19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사적으로 지정된 면적은 전체의 1/20도 채 되지 않는 좁은 면적이고, 동래역과 역 앞쪽의 연립 주택 지역 일대에 걸쳐 있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지역을 경계로 서쪽은 생활 쓰레기를 버린 지역이고, 동쪽과 남쪽 일대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패총을 포함한 이곳 일대는 대규모의 유적으로서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 대까지 오랜 기간 존속한 삼한·삼국 시대의 부산의 중심인 마을 유적으로서 문헌에 나오는 독로국(瀆盧國)의 지배층들이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마을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적으로는 미음동 분절 조개더미, 영도구 조도 조개더미 등이 있다. 그리고 부산 시민 공원 부지 내에서도 삼국 시대의 수혈 또는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다수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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